헤르만 헤세의 장편소설 ‘유리알 유희’(1943년)에서 오락은 최고?최선의 가치를 담고 있는 종합예술로 그려진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2200년경 ‘카스터리엔’이라는 왕국에서 가상의 오락, 유리알 유희는 고래(古來)의 온갖 학예의 정수를 영재들에게 가르치는 수단이다. 인류가 황폐화된 정신의 권위를 되살리기 위해 문화와 문명을 집약한 오락을 고안해 내 이를 지켜나간다는 가상의 이야기다. 오늘날 이 유리알 유희는 주로 ‘VR’(Virtual Reality:가상현실) 세계에 빗대어진다. 물론 오늘날 가상현실은 헤르만 헤세가 예언한 것처럼 ‘정신의 권위’를 찾기 위해 고안된 ‘예술’이나 ‘영재교육’의 수단이 아니다. 더구나 가상현실 오락의 대명사 온라인 게임은 아이템 현금거래, 게임중독 등 사회적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인간욕망의 분출구로 그칠 것만 같다.
이런 가운데 ‘영원한 제국’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인화(39?본명 류철균)가 차세대 종합예술로서 온라인 게임의 가능성에 주목, 한?일 공동제작 온라인 게임 ‘쉔무 온라인’의 시나리오 작업을 맡아 눈길을 끌고 있다. 검증된 문학인이 온라인 게임 시나리오를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쉔무온라인 한?일 공동제작은 일본 대표적 게임 개발업체 ‘세가’가 우리나라의 ‘JC엔터테인먼트’(이하 JC)와 손잡고 세가의 액션 롤플레잉게임 ‘쉔무’ 시리즈를 온라인화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내년 오픈 베타가 예정된 이 게임은 제작비만 300억~4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 이인화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에겐 그가 온라인 게임 제작에 참여한 것이 ‘뉴스’가 아니다. 이미 그는 지난해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를 출범시키고, 온라인 환경에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어떻게 창작할지 고민해왔다.
“게임은 현재 사회에서 그리고 있는 괘적보다 한층 승화된 위치까지 가야 해요. 철학자 아도르노에 필적할 만한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이라는 책을 보면 ‘예술 체험의 형태는 예술 게임의 형태로 발전한다’며 예술의 궁극적인 모델이 게임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미래소설 ‘유리알 유희’도 그런 증후를 알리는 전주곡이죠.”
자고로 어느 시대에나 ‘스토리텔링’을 장악하는 예술 장르가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연극’이었고, 중세에는 ‘극시’였다. 현대에 와서는 소설에 이어 영화가 각광을 받고 있는데, 앞으로는 온라인 게임이 한 축을 맡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재 스토리텔링의 장(場)은 새로운 영역들이 혼재돼 있는 상태라고 진단한다.
“이 때문에 장르적 선입견에 갇히는 것은 많은 가능성을 미리 제단할 위험이 있습니다. 요즘 게임, 영화, 소설 장르를 아우르는 ‘동시발상법’이 아니면 대중에게 어필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그는 이번 쉔무 온라인 제작에서 ‘스토리 아이디에이션’(Story Ideation) 부분에 참여했다. 스토리 이데이션이란 주어진 시나리오를 게임에 맞게 구현할 수 있는 형태가 될 때까지 몇번이고 다듬는 작업. 이를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6월까지 일본의 스타 게임 제작자, 쉔무1?2의 스즈키 유, JC의 김장욱 제작팀장 등과 머리를 싸맸다. 특히 쉔무 온라인에서 유저에게 부여되는 수천개의 ‘퀘스트(임무)’ 시나리오를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와 함께 주인공 캐릭터의 뒷배경 이야기, 게임 시작 전 쉔무 온라인을 소개하는 ‘런칭 스토리’ 등도 맡았다. 퀘스트 시나리오를 일일이 써 나가면서 그는 여러 한국의 온라인 게임의 시나리오를 살펴보게 됐고,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피부로 느꼈다.
◇일본 대표적 게임 제작사 ‘세가’와 국내 온라인 게임 제작사 ‘JC엔터테인먼트’가 손잡고 제작 중인 1000억원대 온라인 게임 ‘쉔무 온라인’에 등장하는 캐릭터 모습.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은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약해요. 오죽하면 온라인 게임을 ‘후진국형 게임’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저는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의 미국 진출에서 가장 큰 장벽이 ‘스토리가 없다’는 취약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온라인 게임은 다양성에도 문제가 있어요. 대부분 비슷비슷한 판타지 베틀게임이죠.”
쉔무 온라인은 유저의 ‘자유도’와 ‘사실성’이 극한으로 치닫는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되고 있다. 이미 쉔무 전작 시리즈도 높은 사실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게임 속에서 게이머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유저는 게임 속 내러티브를 따라와야한다’는 명제조차 무시될 수 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 수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고, 게임 센터에서 오락만 해도 뭐라 하는 사람 없다. 물론 내러티브에 따라 게임 진행을 할 경우 군데군데 삽입되는 동영상을 통해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스즈키 유는 90년대 초 게임이 ‘2D’(평면)에서 어디로 나갈지 고민하던 시기에, 격투게임 버츄얼파이터를 선보여 사실적인 ‘3D’가 해답이라고 명쾌하게 주장한 사람이다. 이번 온라인 게임 제작에서도 그는 사실성을 강조해 한국 온라인 게임 제작자들과 수차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쉔무 온라인은 스즈키 유가 주장하는 ‘사실성’이 판타지적 요소가 강한 한국 온라인 게임과 절충된 형태입니다. 90%가 사실적이라면, 10%의 판타지적 요소가 있죠. 그렇다고 기존 온라인 게임처럼 좋은 무기 하나로 몬스터를 몇 방에 때려잡는 ‘과장’은 없을 거예요.”
퀘스트 시나리오도 사실적이다. 198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서린 슬픔과 고독을 간직한 소박한 서민 출신의 주인공이 ‘영웅’이 되는 과정을 그린다. 각 퀘스트는 추리물, 액션물, 호러물 등 마치 비디오 게임을 온라인에서 즐기는 것 같은 타격감과 높은 그래픽을 선사한다. 뿐만 아니라 게임 속 사실적인 ‘우여곡절’을 통해 유저가 인생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
“현실에서 느끼는 인간적 감정을 온라인 게임에서 느낄 수 있죠. 온라인 게임에서 ‘여자마법사’를 하고 있는데, 같이 게임하는 남자를 진짜 사랑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많아요.(웃음) 가상현실에서 또다른 내 자신을 발견하는 거죠. 우리는 앞으로 살아갈 유비쿼터스 시대에 느끼는 실존의 감각을 온라인 게임에서 미리 느끼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래의 삶이 가지는 의식과 감정이 이와 닮지 않았을까요.”
이번 쉔무 온라인은 그에게 ‘습작’이다. 게임 시나리오와 맵 설계가 된 상태에서 이뤄지는 시나리오 작업은 운신의 폭이 넓지 않아 그리 성에 차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농동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그 욕망을 무조건 분출되기보다 순화된다. 예컨대 게임 초반에 갱들의 폭력이 난무하지만, 게임 속 시스템을 통해 시간이 흐를수록 폭력이 문화적인 행동으로 다듬어지는 그런 게임이다. ‘선’과 ‘악’이 혼재돼 있다가도 결국에는 평화를 지향함으로써 어떤 ‘가치’를 게임 속에 담고 싶다. 아마 그가 머릿속에 그리는 것은 ‘유리알 유희’라는 헤르만 헤세의 예언이 실현된다면 한번쯤 건너야 할 ‘디딤돌’ 같은 게임이 아닐까.
우한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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