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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글] 일본 전국시대의 이해 -하이텔시뮬동 정동희(TLOTR)님.1997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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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글] 일본 전국시대의 이해 -하이텔시뮬동 정동희(TLOTR)님.1997년.

foxfod 2005. 4. 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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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글] 일본 전국시대의 이해 -하이텔시뮬동 정동희(TLOTR)님.1997년.
번호: 72글쓴이: 하얀용whtdrgon.
조회: 98날짜: 2003/09/01 16:44
이 글들은 하이텔 시뮬레이션 동호회 소모임 전국시대클럽의 회원이신 정동희(TLOTR)님이
올리신글을 전성모(plunger1)님이 갈무리해서 편집하여 문서화일로 정리하신 것입니다.



제목 : [幸村/연재]× 노부나가 연재
오늘부터 노부나가에대한 저의 생각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신장의 야망이란 게임을 탄생시켰을 정도로 노부나가란 인물은
일본 역사에서 매우 두드러진 인물이었고 그의 행적또한
범인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장의 야망이나 기타 전국시대 관련 서적들에서는
노부나가가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또 그의 능력이 상당히 과장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노부나가는 완벽한 천재형의 인간이었는지 아니면
시운을 타고난 풍운아(결점많은)였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제목 : 오케하자마 합전 #2
노부나가의 일생에 있어서 오케하자마 합전은 가장 중요한 일전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가 이 싸움에서 패했다면 노부나가란 이름은 더이상
거론될 필요가 없었겠죠.
오케하자마 합전 당시 노부나가의 세력은 아직 미약 했고 그가
동원할 수 있었던 군사는 10000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비해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3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상경을
하고 있었지요.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노부나가는 전혀 승산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에서 요시모토의 본진을
기습하여 대역전극을 펼쳐 보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노부나가는 어떻게 하여 이같은 승리를연출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노부나가의 천재성의 발현이었을까요 아니면 노부나가의 행운과
요시모토의 불운이 불러온 합작품이었을까요?
전 노부나가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이 오케하자마전투에 있어서만은
행운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노부나가도 잘한점이 많습니다. 그는 초반 요시모토가 자신의
영지를 마구 휘젖는 것을 내버려두고 자포자기에 빠진것처럼 행동하여
요시모토를 방심하게 했으면 요시모토가 좁은 협곡인 오케하자마에
머무를때 비호같이 기습하여 승리를 얻어 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상대가 방심했기때문에 얻어진 승리이지
자신의 힘만으로 얻어진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만약 요시모토가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노부나가의 이러한
작전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을 겁니다.
또한 기습전에 내린 비도 실로 하늘의 도움이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었다면 상황은 상당히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쯤에서 우리는 노부나가와 이에야쓰의 성격을 비교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일단 둘은 모두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한 가문의
총수였습니다. 또 세력의 차이는 있었지만 둘다 요시모토의 힘에
대항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에야쓰는 요시모토에 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에 밑으로 들어갑니다. 또한 노부나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머리를 숙이거나 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숭리를 얻습니다.
이 두사람의 방식중 어느것이 더 좋으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전 개인적으로 노부나가의 방법보다는 이에야쓰의 방법이
성공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요시모토는 나이가 꽤 많았고(거의 노령기) 그의 아들은
형편없었습니다. 또한 셋사이가 죽은 이후로는 주변에
그렇게 뛰어난 가신을 거느리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에야쓰와 오와리패는 요시모토의 휘하 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요시모토 사후 이에야쓰가
독립하여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를 공격하는 장면에서도
잘 들어납니다.
전국시대에는 이처럼 실력없는 후계자를 유망한 가신이 몰아내고
권력을 빼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노부나가가
일찌감치 요시모토에게 항복하여 그의 선봉이 될 것을 자처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요?
요시모토의 세력에 오와리패가 합류한다면 그 힘은 대단했을 겁니다.
또한 노부나가도 요시모토의 그늘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갈수
이었을 겁니다. 다시말해 천천히 기다리며 요시모토의 사후를
노릴수 있었을 거라는 것이죠.
또한 이런식으로 했다면 미노의 사이또가나 아사이 아사꾸라등도
훨씬 손쉽게 물리칠 수 있었을 겁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가정에 불과합니다.
또한 역사에서 가정이란건 별 의미가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가정을 통해서 노부나가의 행동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번에는 노부나가와 사이또씨의 싸움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 오다와 사이또 #3
오다가와 사이또가는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요.
먼저 두 가문을 이르킨 사람이 모두 그다지 좋은 배경을 가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인을 내치고 영주가 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죠. 다시말해 두 가문 모두 대표적인 전국대명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과연 오다와 사이또는 무슨 관련이 있느냐......
요시모토를 물리친 뒤 오다의 세력은 급격히 성장했죠.
하지만 아직도 동쪽엔 이마가와의 잔당들이 있었고, 북쪽의 사이또가는
결코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도산이 그의 아들이었던 요시타쓰와 불화끝에 결국 아들에게
살해당하게 되죠.
오다는 이 기회를 틈타 사이또가와 절연하고 장인의 원한을 갑는다는
명목으로 요시타쓰를 여러차례 공격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죠.
비록 도산이 죽었다고는했지만 그가 길러논 미노패는 오와리패 못지않은
정예군이었고 요시타쓰또한 보기드문 거구(6척, 당시일본 평균이 155쯤 됐을까?)
의 엄청난 용장이었죠.(아버지를 닮아 지략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또한 이나바 잇테쓰, 우지이에 보꾸덴, 다께나까 한베에등 용장들도 즐비했죠.
때문에 오다는 사이또가의 공력에 대단히 애를 먹게 됩니다.
하지만 항상 행운이 따르는 오다.......
그 강인하던 요시타쓰가 문둥병이라는 괴질로 30대의나이에 요절하게 되죠.
그리고 아직 어린애에 불과했던 다쓰오끼가 사이또가의 가독을 상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또가의 공략은 몇차례 더 실패하죠.
그때 전국시대의 히어로 히데요시가 등장해서 하치스카 고로꾸와 함꼐 오다
의 근심을 일순간에 해소해 주죠.
거기다 하치스카 고로꾸와 다께나까 한베에라는 뛰어난 장수들도 포섭해오죠.
이리하여 미노는 오다의 소유가 되고
오다의 영지는 두배이상으로 크게 늘어나죠.
또한 이후로 미노패는 오와리패와 함꼐 오다군의 주축을 이루게 되죠.
여기서 우리는 오다의 두가의 행운을 살펴 봡습니다.
첫째는 사이또 요시타쓰의 급사이고
둘째는 히데요시를 얻었다는 것이죠.
엄밀히 말해 두번째 행운은 단순히 행운이라고만 볼 수 는 없겠죠.
전통과 가문을 중시하던 당시에 그런 파격적인 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노부나가외에 과연 누가 있었을까요?
하지만 요시타쓰의 급사는 좀 눈여겨 볼만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요시타쓰가 죽지 않았다면 오다의세력확장은 상당히 어려웠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엔 오다와 아사이, 아사꾸라의 싸움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 노부나가의 입경 #4
아사이와 아사쿠라의 얘기를 다루려 했는데
그들과의 싸움이 좀 길어서요.
시대적으로 앞섰던 얘기부터 하는게 좋을것 같군요.
오와리의 작은 영주였던 노부나가는 요시모토를 죽인 이후보다는
미노를 손에 넣은 이후 더욱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영지가 늘었으니까)
또한 이때 노부나가가 이나바산성을 기후성으로 개명한것이라든지
천하포무라는 인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에서
그가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앞에는 오오미의 롯까꾸.사사끼씨, 교토의 미요시삼인방
마쓰나가 히사히데, 쓰쓰이씨등이 버티고 있었죠.
하지만 이들 세력은 사실 오다와 맞서기에는 뭐랄까 병력은 꽤 있었지만
세기면에서 부족했다고나 할까요?
또 때마침 미요시와 마쓰나가의 횡포를 피해 오다에게 몸을 맡겼던
요시아끼또한 오다군에 명분을 세워주게 되죠.
노부나가는 또한 일전에 이에야쓰와 동맹르 맺은바가 있고, 북쪽의
아사이가와도 사이또씨를 칠때 동맹을 맺어 두었습니다.
아사이가에게는 잘 아시는대로 나가마사에게 여동생을 시집 보냈었죠.
여기서 우리는 잠시나마 노부나가가 아사이씨와의 동맹을
굉장히 필요로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이 혼인이지 당시에 다른 가문에 딸을(여동생을)보내는 것은
사실상 인질에 가까웠으니까요.
보통 좀 궁한쪽이 딸을 보내죠.
어쨌든 이러한 동맹으로 노부나가는 안심하고(?) 오오미의 롯카쿠씨를
여유있게 물리치고, 이어 미요시와 마쓰나가세력이 동망쳐버린
교토로 입경하게 됩니다.
이후로 노부나가는 요시아끼를 장군으로 추대하고 그의 이름을 빌려
각군의 영주들을 소집하게 됩니다.
물론 유력한 영주들은 거의 오지 않았죠.
하지만 명분은 교토와 천황을 장악한 노부나가에게 있었고
이제 노부나가는 명실상부한 일본의 실력가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길은 아직도 험했죠.
미요시삼인방과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시꼬꾸서안과 근기지역에서
끊임없이 교토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롯까꾸씨와 사이또가의 잔당들도 곳곳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노부나가를
괴롭혔죠.
앞으로는 노부나가와 앞서말한 그의 적들과의 싸움을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다음번엔 그 첫번째로 노부나가의 최대 숙적중 하나인 아사이.아사쿠라
씨와의 싸움을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 아사이 아사쿠라와의 싸움 #5
전 개임적으로 노부나가 최대의 적을 혼간지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다른 여러 분들도 제 생각과 같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전 그 다음의 숙적으로 바로 이 아사이, 아사쿠라가를 꼽고
싶습니다.
물론 그 밖에 다께다나 우에스끼 모리같은 많은 맹장들을 거느린
대세력도 있었지만 이들과의 싸움은 이미 노부나가가 근기지역을
장악하고 세력을 굳히던 때였끼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사이,아사쿠라와 오다의 인연은 상당히 꽤나 얽혀 있습니다.
일단 아사쿠라와 오다가는 같은 주인을 섬기던 가문이었죠.
그런데 그당시는 아사쿠라가의 지체가 오다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아사쿠라가는 오다가를 얖잡아보고 있었으며, 그가 상경하여
천하를 주무르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아사이와 아사쿠라의 관계는 정말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죠.
일찌기 아사이 나가마사의 조부때에 아사이가는 아사쿠라의 지원을
받아 롯카쿠씨를물리치고 북오오미를 장악 할 수 있었죠.
아사쿠라또한 아사이와의 동맹으로 남쪽과 동쪽으로 부터의 공격을
막을 수 가 있었습니다.
중국성어에 순망치한(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란 말이 있는데
아사이와 아사쿠라의 관계야말로 바로 이 입술과 이와같은 관계
였습니다.
때문에 아사이가는 노부나가가 혼인과 동맹을 요청했을 때
우리와 동맹을 맺을려면 아사쿠라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오다와 아사쿠라가 불편한 관계라는 걸
감안한 조항이었지요.)
이때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이 동맹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 이후 노부나가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입경을 성공시켰으며
어마어마한 대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시카게는 이런 노부나가를 가만히 둬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렇다면 과연 노부나가는 어느정도 안정이 된 상태에서 누굴
가장 먼저 쳤을까요?
그건 미요시도 혼간지도 아닌 마로 아사쿠라였습니다.
그간 오다가의 일을 사사껀껀 방해하고(사이또의 잔당들도 이쪽으로
피신해 있었음) 훼방높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로 부터도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었죠.
노부나가는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요시카게를 치기위해 가네가사끼로
나갑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었죠.
일찌기 노부나가는 아사이와 동맹을 맺으면서 아사쿠라가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는 아사이에게는 한마디도 하지않고
당당히(?) 그 약속을 어겨버렸죠.
여기서 우리는 노부나가의 성격이 상당히 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부나가는 그간의 성공과 지위의 상승(소영주 -> 대영주)속에서
점점 거만해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세력이 미약했을때는 아사이와의 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해 상당히 저자세로 나갔었죠.
화장실 들어갈때 다르고 나올때 다르다는 듯이 노부나가의 태도는
이처럼 상당히 고압적으로 변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디어 문제가 터지죠.
세력과 지위에 있어 요시카게를 훨씬 능가했던 노부나가는 아사이가
실리를따져 자기쪽에 붙을줄 알았지만, 아사이가는 뜻밖에도
당시에 보기드문 의리를 발휘해서 오다가에 절연장을 보내고
아사쿠라와 함께 노부나가를 앞뒤로 협공하죠.
만약 이때 아사이가 절연장 같은걸 보내지 않고 막바로 노부나가를
급습했다면 아마도 노부나가는 살아 돌아가기 어려웠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와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활약으로 무사히 교토로 귀환하죠.
어쨌든 이 싸움으로 노부나가는 많은 손실을 입었으며
이때까지 동맹이었던 아사이가 적으로 돌아서게 되어버리죠.
한마디로 이 싸움은 노부나가의 경솔한 자만심이 불러온 패전이라고
할 수 잇을 것입니다.
아사이 아사꾸라와의 싸움은 길기ㄸ문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번엔 그 뒤의 싸움들을 살펴보기로 하죠.
오자가 많아서 죄송합니다.

제목 : [幸村/기타]× 아네가와 합전 #6
사실 이 싸움에 대해선 모두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또 사실 별로 특기할 만한 점이 없는 싸움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바로 이 특기할 만한 점이 없다는 것이 바로 생각해
볼만 한 점이라고 봅니다.
우린 어렸을때부터 삼국지를 많이 보아왔죠.
그런데 삼국지에서는 전투의 승패가 대부분 무장들의 지략에 의해
판가름 지어지는 것처럼 지극히 과장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왠지모르게 대세보다는 인물위주로
관심이 기울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뛰어난 사령관이 있는것과 없는것은 큰 차이가 있겠지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때 소수가 다수를 이긴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처음엔 좀 이기는 듯 싶어도 결국은 지고 말죠.
삼국지의 저자 나관중이 그렇게 공명과 유비를 치켜올렸어도 결국은
지지 않았습니까?
아네가와 합전은 바론 이런 대세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번 가네가사끼에서 나가마사의 배신으로(사실 노부나가가 먼저 배신
했지만) 치욕의 패배를 당한 노부나가는
세력이 회복되자 마자 아사이를 치기위해 북오오미로 출진합니다.
물론 지난번 싸움에서 제일먼저 퇴각했던 이에야쓰도
이번만큼은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약 5000~6000정도를 이끌고
출진했죠.
이에 나가마사는 아사쿠라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요시카게는 일족인
가게쓰네를 대장으로 약 10000의 원군을 파견하죠.
아사이 아사쿠라쪽이 약 15000~6000정도
오다 도쿠가와 군이 약 25000정도
약 10000명가까운 차이가 나죠.
물론 기록에 따라 틀리겠지만 대략 이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아네가와 강가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이에야쓰는 후진에서 싸우라는
노부나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두배가까이 되는 아사쿠라 군을 상대하겠다고
나오죠.
때문에 이에야쓰는 아사쿠라군을 상대로 노부나가는 자기 군사의 1/3
정도 밖에 안되는 아사이군을 상대로 싸우게 됩니다.
하지만 초반 전투의 양상은 양쪽 모두에서 소수가 다수를 누르는 양상을
보이죠.
지난번에 일찌감치 퇴각했던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듯 이에야쓰와
미까와패는 특유의 강인함으로 아사쿠라군을 앞도했죠.
반면에 훨씬 수가 많았던 오다군은 여기서 지면 가문이 몰락한다는
필사의 각오로 나온 아사이군에 의해 정면이 돌파당할 위기에까지
몰리게 됩니다.
아지만 때마침 아사쿠라군을 밀어내던 미까와패가 아사이군의 옆구리를
치게되고 이때 노부나가는 상비군으로 돌려놓았던 5000여 군사를
투입시켜 승리를 굳히는 동시에 퇴각하는 적을 공격하죠.
이 싸움은 사실 수와 사기에서 결정났다고 할 만큼 장군들이 크게
머리를 쓴게 없었죠.
이 싸움에선 신기묘산의 전술보다는 불굴의 투지가 더욱 빛을 발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전국시대의 싸움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습니다.
3만이상의 군사가 싸움을 할 수 있는 장소는 평야밖에 없습니다.
산속에서 싸우기는 너무 거추장스럽죠.
3만의 군사가 들판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히한한 작전
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냥 열심히 싸우는 수밖에 없죠.
결국 수에서 앞선쪽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노부나가의 전략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았다고 봅니다.
노부나가는 혼간지를 몰아낼때까지 무수히 많은 패배를 당합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요령있게 졌죠.
그리고 이길때는 확실하게 이겼습니다.
노부나가를 천재라고 하는것은 그가 공명같은 전술을 구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뛰어난 점은 대세를 바로 파악한다는 점이죠.
다음에 다루겠지만 노부나가의 적들은 노부나가를 벼랑끝까지 몰아놓고
후퇴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노부나가는 외교에도 매우 뛰어났죠.(물론 실수한 적도 있지만...)
그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적은 될수있으면 저자세로 피해가려 했습니다.
다께다와 우에스끼와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맹상태로 있으려 했죠.
어쨌든 이 싸움으로 노부나가는 한숨 돌리게 됩니다.
하지만 노부나가도 아사이 아사쿠라의 세력을 오나전히 뿌리 뽑지는 못했죠.
그는 그들 말고도 적이 많았으니까요.
노부나가는 이싸움뒤에 바로 교토로 난입한 미요시 삼인방을 몰아내야
했으니까요.
다음번에 강장 치열했던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싸움을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원낙 오래싸워서 몇번에 걸쳐 나눠서 해야 될것 같군요.
그럼 이만

제목 : [幸村/기타]× 혼간지의 설립 배경 #7
오다와 혼간지의 싸움을 살펴보기 전에 과연 혼간지란
절이 어떤 절이길래 그 누구도 맞서지 못한 오다에 대항해
10년간이나 싸울 수 있었는지를 밝혀 보려고 합니다.
불교는 서기 538년 백제 성왕ㄸ에 일본에 전해 졌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불교는 오아실과 귀족의 이익과 지배논리를
대변하는 귀족중심의 불교였죠.
따라서 당시의 불교는 주로 귀족들에 의해 받아들여 졌고, 또 귀족들의
지원하에 성장했었죠.
지족과 황실은 각자가 다니는 절이나 종파에 토지나 각종 자산을
시주했고, 이러한 결과로 일본의 절은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소유하게
됐죠.
또한 이 당시의 불교는 이론을 중시하는 교종이었기 때문에
가난하고 무지한 일반 백성들은 불경을 살수도 볼수도 없었기
습니다.
당연히 일반 대중들에 대한 포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죠.
이렇게 귀족들의 지원하에 강대해진 사원은 사원소유의 재산을
관리하기위해 승병을 만들죠.
또한 막대해진 힘으로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귀족화되고 사치스러워진 불교는 점점 타락해가게 되죠.
이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靜土宗을 창시한 호넨(法然)이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만으로도 극락에 다다를 수 있다고 설법했죠.
다시말해 정토종의 논리로 볼때는 불경이나 교리를 잘 몰라도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거죠.(원효의 사상과도 유사하죠.)
이 호넨의 제자인 新鸞은 정토종의 교리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정토진종을 만듭니다.
정토진종은 단 한번만의 염불로도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매우 진보적인(?)
종파였죠.
하지만 정토진종은 이같은 급진적인 사상때문에 다른 종파와 지배층으로
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몰락해가던 혼간지(정토진종)를 되살린이가
바로 렌뇨입니다.
렌뇨(蓮如)는 북륙지방에서 농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정력적으로
정토진종을 설법했고, 그 결과 무너져가던 정토진종은 다시 빛을
보게 됩니다.
단순한 교리와 렌뇨의 자상한 가르침이 민중의 가슴에 파고든 것이죠.
이러한 부흥으로 렌뇨는 야마시나에 혼간지(정토진종 본산의 이름)를
다시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죠.
강력한 민중세력으로 변한 혼간지를 주변의 영주들이 공격해 왔던 겁니다.
당시는 이미 전국시대에 접어든 때였고 모든 토지는 이미 귀족의
손에서 무사의 손으로 넘어간 때였습니다.
물론 농민들은 무사들이 가혹한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죠.
때문에 영주들은 농민들을 규합해 자신들에 대항하려 하는 혼간지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겁니다.
당시 근기지방의 관령 호소까와 하루모토는 니찌렌종(법화경의 유일한
진리로 믿는 종파) 신자들과 함세하여 야마시나의 혼간지를 공격하죠.
(아아!!! 실수 호소까와 하루모토가 아니라 롯까꾸 사다요리 입니다.
천상기 시나리오 1번에서 롯카쿠가의 대명으로 나오죠.)
때문에 혼간지는 다시 이시야마(오사까)로 옯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엔 다시 근기관령 호소까와 하루모토(시나리오 1번의
호소까와가 대명)가 이시야마혼간지로 쳐들어오죠. 그러나 혼간지는
오랜 포위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지형적 이점을 살려 끝까지 본산을
사수해 내죠.
이처럼 혼간지에 대한 대명들의 공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혼간지는 항상 여러 대명의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죠.
여기서 오다 이전에 혼간지와 싸운 주요 대명들을 들어보면
아사쿠라가, 나가오가(우에스끼의 전신), 롯카쿠가, 호소카와가, 미요시가등
당시 근기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했던 대부분의 가문들이 혼간지와
끊임없이 싸웠죠.
근기지역에 대한 무사세력과 사원세력의 싸움이라고나 할까요....
아쨌든 혼간지는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다음번에는 겐뇨대의 혼간지의 모습과 혼간지가 왜 노부나가와
싸우게 됐는지에 대해 써 보겠습니다.
오타가 많아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제목 : [幸村/기타]× 철포의 전래와 계발 #8
노부나가 얘기하는데 왠 철포냐고 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이 철포만큼 당시의 전국상황을 크게 흔들어 놓았던 것이
없다고 전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철포가 노부나가에 의해 처음으로 실전에서
유용하게 사용된 것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나가시노 전투에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노부나가는 철포의 최대 피해자 였다고도 할 수 있겠죠.
다시말해 노부나가는 철포에 많이 당했기 ㄸ문에 누구보다도
철포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철포는 구주의 최남단인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갈 선박으로 부터 전래됩니다.
당시 다네가시마의도주는 멀리있는 과녁을 명중시키는 철포의
위력에 반해서 두자루를 만금(?)을 주고 샀다고 하지요.
하지만 당시 다네가시마의 도주는 이 총의 여러가지 약점(비,장전시간)때문에
실전에 사용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다만 사냥용으로
쓸려고 했죠.
이러한 철포는 곳 당시 일본경제의 중심지였던 사까이로 전래되었고
이 신무기의 위력을 알게된 영주들은 앞다투어 철포의 제작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남의 물건 하나 같다가 그대로 베낀다는게 쉬운일은
아니었죠.
때문에 초기의 철포는 성능도 매우 나빴으며 몇발만 쏴도 총열이
쉽게 구부러지고 사정거리도 짧은 그런 것이었습니다.(사정거리 50m)
그러던 철포가 본격적으로 빛을 보게 된것은 바로 사이카패와 네고로사의
중들에 의해서죠.
네고로사는 고래로 부터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찰이었고 전국시대가 된
당시에도 영주들에 지지않고 끝까지 영지를 지켜내고 있었죠.
당시 네고로사에는 약 2만여의 승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네고로사의 주지의 동생인가 하는자가 신무기인 철포를 가져오게 되고
곳이어 네고로사에서는 철포의 개량과 실전사용법을 연구하게 되죠.
(당시에는 그래도 중이 제일 지식층 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철포를 개량하고 실전법을 익힌 네고로사의 승병들은 곳 각지에서
용병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죠.
네고로사와 더불어 철포의 실전사용에 앞장섰던 집단은 바로 기이의
사이까패 였습니다.
기이의 대부분이 인구가 밀집했던 사이까지역에는 당시 특별히 대명은
없었으며 가장큰 마을인 사이까촌의 장로가 전체 마을들을
이끌고 있었죠.
당시 기이지역은 일본의 내해이자 무역의 중심이었던 세토내해의 요지였기
때문에 어로나 농업보다는 주로 무여과 해적질(?)로 많은 부를
축적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는 그들이 엄청난 고가였던 총을 많이 소유할 수 있게하는
원동력이 되었죠. (네고로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죠. 절은 돈이 많거든요.)
이런식으로 철포를 능숙하게 사용하게 된 사이까패는 역시 전국시대의
일급용병으로 많은 보수를 받으며 명성을 얻게 되었죠.
사이카패는 용병수입으로 얻은 돈을 계속해서 총에 투자하여 노부나가입경
시에는 약 4000자루이상의 총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노부나가가 아네가와 합전에서 사용한 총의 수가 모두 500자루
였습니다.
사이까 촌의 인구가 남녀노소합쳐 채 만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글ㅆ요. 4000정의 철포는 정말 대단한 숫자라고 할 수 있겠죠.
사이카패의 성인남자는 모두 한자루씩 가지고 있다고 봐야겠죠.
때문에 당시의 영주들은 이들 사이카패와 네고로패와 같은 총을 가진
집단을 고용하라고 애썼으며 이점은 노부나가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노부나가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던......
(아사쿠라 아사이가 뭐가 그렇게 위협적이냐고요?
노부나가는 당시 10개국이상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 주축은
역시 오와리패와 미노패 였습니다. 또한 노부나가의 대부분의 자금과
실량역시 대부분 오와리와 미노쪽에서 나오고 있었죠.
또한 새로 얻은 영지와 동맹자들은 상황에 따라 어느쪽에 붙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와리와 미노는 역시 오다가의 심장부라
할 수 있었죠.
그런데 만약 아사이와 아사쿠라가 교토와 미노사이의 보급선을 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는 그들이 비어있는 미노로 진격해 들어간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찌됐건 당시 노부나가가 교토지역에서 싸우고 있었던 적들은(미요시,
혼간지, 마쓰나가 히사히데, 쓰쓰이등등) 이런 플레이는 할 수 없었겠죠.
또한 다께다와 우에스끼는 그때까지 서로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부나가의 근거지를 공격할 만한 실력을 가진 영주는
바로 아사이와 아사쿠라 밖에 는 없었다는 것이죠.
때문에 노부나가는 아사이 아사쿠라의 공격을 가장 먼저 서둘렀던 것입니다.
삼천포로 빠졌군요.)
어쩄든 아네가와 싸움에서 아사이 아사쿠라연합군에 큰 타격을 입힌
노부나가는 이번엔 근기지역의 최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혼간지와의
싸움을 계획하게 됩니다.
노부나가는 그 전초작업으로 네고로패와 사이카패를 끌어들이려 하지만
네고로패의 영입에만 성공하고 사이카패의 고용에는 실패하죠.
이는 바로 사이카패가 정토진종(혼간지)신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이카패는 노부나가의 혼간지 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각자 총과 식량을 짊어지고 혼간지로 집결하죠.
앞으로 벌어지는 싸움이야 말로 정말 재미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철포의 유래와 일본내에서의 발전에 대해 간략히 다루어 봤습니다.
다음번에 바로 이뒤에 있는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처절한
싸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오타가 많아서 죄송합니다.
잘 보아 주십시요.

제목 : [幸村/기타]× 노부나가의 미요시 공격 #9
노부나가 얘기하는데 왠 철포냐고 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이 철포만큼 당시의 전국상황을 크게 흔들어 놓았던 것이
없다고 전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철포가 노부나가에 의해 처음으로 실전에서
유용하게 사용된 것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나가시노 전투에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노부나가는 철포의 최대 피해자 였다고도 할 수 있겠죠.
다시말해 노부나가는 철포에 많이 당했기 ㄸ문에 누구보다도
철포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철포는 구주의 최남단인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갈 선박으로 부터 전래됩니다.
당시 다네가시마의도주는 멀리있는 과녁을 명중시키는 철포의
위력에 반해서 두자루를 만금(?)을 주고 샀다고 하지요.
하지만 당시 다네가시마의 도주는 이 총의 여러가지 약점(비,장전시간)때문에
실전에 사용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다만 사냥용으로
쓸려고 했죠.
이러한 철포는 곳 당시 일본경제의 중심지였던 사까이로 전래되었고
이 신무기의 위력을 알게된 영주들은 앞다투어 철포의 제작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남의 물건 하나 같다가 그대로 베낀다는게 쉬운일은
아니었죠.
때문에 초기의 철포는 성능도 매우 나빴으며 몇발만 쏴도 총열이
쉽게 구부러지고 사정거리도 짧은 그런 것이었습니다.(사정거리 50m)
그러던 철포가 본격적으로 빛을 보게 된것은 바로 사이카패와 네고로사의
중들에 의해서죠.
네고로사는 고래로 부터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찰이었고 전국시대가 된
당시에도 영주들에 지지않고 끝까지 영지를 지켜내고 있었죠.
당시 네고로사에는 약 2만여의 승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네고로사의 주지의 동생인가 하는자가 신무기인 철포를 가져오게 되고
곳이어 네고로사에서는 철포의 개량과 실전사용법을 연구하게 되죠.
(당시에는 그래도 중이 제일 지식층 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철포를 개량하고 실전법을 익힌 네고로사의 승병들은 곳 각지에서
용병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죠.
네고로사와 더불어 철포의 실전사용에 앞장섰던 집단은 바로 기이의
사이까패 였습니다.
기이의 대부분이 인구가 밀집했던 사이까지역에는 당시 특별히 대명은
없었으며 가장큰 마을인 사이까촌의 장로가 전체 마을들을
이끌고 있었죠.
당시 기이지역은 일본의 내해이자 무역의 중심이었던 세토내해의 요지였기
때문에 어로나 농업보다는 주로 무여과 해적질(?)로 많은 부를
축적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는 그들이 엄청난 고가였던 총을 많이 소유할 수 있게하는
원동력이 되었죠. (네고로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죠. 절은 돈이 많거든요.)
이런식으로 철포를 능숙하게 사용하게 된 사이까패는 역시 전국시대의
일급용병으로 많은 보수를 받으며 명성을 얻게 되었죠.
사이카패는 용병수입으로 얻은 돈을 계속해서 총에 투자하여 노부나가입경
시에는 약 4000자루이상의 총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노부나가가 아네가와 합전에서 사용한 총의 수가 모두 500자루
였습니다.
사이까 촌의 인구가 남녀노소합쳐 채 만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글ㅆ요. 4000정의 철포는 정말 대단한 숫자라고 할 수 있겠죠.
사이카패의 성인남자는 모두 한자루씩 가지고 있다고 봐야겠죠.
때문에 당시의 영주들은 이들 사이카패와 네고로패와 같은 총을 가진
집단을 고용하라고 애썼으며 이점은 노부나가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노부나가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던......
(아사쿠라 아사이가 뭐가 그렇게 위협적이냐고요?
노부나가는 당시 10개국이상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 주축은
역시 오와리패와 미노패 였습니다. 또한 노부나가의 대부분의 자금과
실량역시 대부분 오와리와 미노쪽에서 나오고 있었죠.
또한 새로 얻은 영지와 동맹자들은 상황에 따라 어느쪽에 붙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와리와 미노는 역시 오다가의 심장부라
할 수 있었죠.
그런데 만약 아사이와 아사쿠라가 교토와 미노사이의 보급선을 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는 그들이 비어있는 미노로 진격해 들어간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찌됐건 당시 노부나가가 교토지역에서 싸우고 있었던 적들은(미요시,
혼간지, 마쓰나가 히사히데, 쓰쓰이등등) 이런 플레이는 할 수 없었겠죠.
또한 다께다와 우에스끼는 그때까지 서로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부나가의 근거지를 공격할 만한 실력을 가진 영주는
바로 아사이와 아사쿠라 밖에 는 없었다는 것이죠.
때문에 노부나가는 아사이 아사쿠라의 공격을 가장 먼저 서둘렀던 것입니다.
삼천포로 빠졌군요.)
어쩄든 아네가와 싸움에서 아사이 아사쿠라연합군에 큰 타격을 입힌
노부나가는 이번엔 근기지역의 최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혼간지와의
싸움을 계획하게 됩니다.
노부나가는 그 전초작업으로 네고로패와 사이카패를 끌어들이려 하지만
네고로패의 영입에만 성공하고 사이카패의 고용에는 실패하죠.
이는 바로 사이카패가 정토진종(혼간지)신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이카패는 노부나가의 혼간지 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각자 총과 식량을 짊어지고 혼간지로 집결하죠.
앞으로 벌어지는 싸움이야 말로 정말 재미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철포의 유래와 일본내에서의 발전에 대해 간략히 다루어 봤습니다.
다음번에 바로 이뒤에 있는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처절한
싸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오타가 많아서 죄송합니다.
잘 보아 주십시요.

제목 : [幸村/기타]× 혼간지 봉기 #10
지난번에 글을 다 쓰고도 글이 올라가지 않아 다시 씁니다.
혼간지의 봉기를 흔히 잇고잇기라고 하죠.
사실 이 잇기(농민반란)은 전부터 항상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이 무사중심의 사회가 되고 수시로 싸움이 일어나게
되면서부터 급격하게 증가했죠.
싸움이 많이 일어나니 무사들은 세금을 더 가혹하게 거둘수 밖에 없고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은 최후의 수단을 쓰기 시작한 거죠.
다시말해 잇고이기는 이러한 농민들의 분노가 종교적 조직력을 바탕으로
일어난 거라고 할 수 있죠.(이런 면에선 동학운동과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통진종을 제외한 다른 종파는 민중과
연대한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토진종이(잇꼬종) 다른 종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보여주죠.
일본 불교또한 처음 건너왔을땐 다른나라와 마찬가지로 왕실과 귀족들이
주축이 되서 수입되었으며 당연히 귀족적이었습니다.
도한 왕족들이 중이 되는 일이 있었을 만틈 중의 지위도 아주 높았죠.
또한 초기의 불교는 교종이었기 때문에 불경의 공부와 언격한 생활을
대단히 강조 했습니다.
아지만 이러한 교종의 교리는 일반 백성들에겐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죠.
농민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책을 샀겠으며(당시의 책은 대단히 비쌌죠.)
설령 산다한들 까막눈인 그들이 어떻게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한 매일 매일 먹고살기 어여운 그들이 어떻게 불교의 교리를
지켜가며 생활 할 수 있었겠습니까?
때문에 정토종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불교는 일반 대중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죠.
이러한 시기에 바로 정토종이 획기적인 교리를 내걸고 등장합니다.
정토종의 중들은 이렇게 말하죠.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극락에 갈 수있다."
정토진종은 거기서 한 술 더 뜹니다.
"일생 단 한번만의 염불로도 극락에 갈 수 있다."
꼭 무슨 사이비 종교 선전문구 같죠.
하짐나 당시의 일본 민중들에게 이러한 정토종의 교리는 대단히 반갑고
마음에 와 닫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정토진종은 그 동안 여자들 배격했던 불교에서 여자까지
포용하는 불교로 변모하죠.
특히 제8대 렌뇨때에는 포교중 사이카패의 장로가 설법을 듣고 감동하여
렌뇨를 사이카소에 데려와 절까지 지어주죠.
살인을 직업으로(용병, 해적)삼던 사이카패에게 그런 일도 염불만 잘 하면
다 용서받고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렌뇨의 설법은 매우 매력적이었을 겁니다.
여하튼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토진종은 근기지역과 북륙지방(에찌젠,가가,노토)
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죠.
또한 곳곳에 절을 세우고 강력한 조직을 구축해 갔습니다.
향촌사회에 깊숙히 뻗어들어간 정토진종 조직은 그 지방의 호족과
토착무사들과 연대 또는 신자의 관계로 맺어져 사실상 향촌사회를
지배하게 되죠.
혼간지의 이러한 조직력은 곳곳에서 대규모 농민봉기로 이어졌고
농민들은 혼간지에서 파견한 중들과 지방호족들의 지휘아래 영주들과
싸워 자치권을 획득하는등 혼간지의 영지는 계속해서 늘어 갔습니다.
당시에는 영주도 절이 가지고 있는 사령에는 손을 대지 못했기 때문에
혼간지의 사령에서 나오는 산출은 일반 영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양이었죠.
여기서 우리는 노부나가가 왜 그토록 집요하게 혼간지를 공격하려
했는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겁니다.
겉으로 들어난 목적은 서국에서 소란을 피우는 미요시일당을 정벌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오사카에 성을 쌓고 싶으니 나가달라는 거였죠.
하지만 이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 했습니다.
노부나가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막부를 수립하길 원했으며 당시의
근기지방에선 영지를 장악하고 있는 노부나가보다도 향촌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는 정토진종의 조직이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죠.
또한 정토진종외의 사원세력와 신사세력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사실 노부나가는 이러한 이유로 영지의 주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방관조차도 파견하지 못하고 있었죠.
때문에 노부나가는 이러한 세력의 영수격인 혼간지를 뿌리 뽑아야만
자신이 진정한 일본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가했던거죠.
이러한 측면에서 노부나가는 미요시 공격을 빌미로 혼간지를 공격하려
했던 겁니다.
하지만 혼간지의 법주 겐뇨도 만만치가 않았죠.
그럼 다시 전투상황으로 돌아가서...............
오다군과 미요시군이 네고로사의 승병들과 사이카패의 총격전으로
싸움을 시작하자. 겐뇨는 급히 근지지역의 문도들에게 서장을 보내
오다군을 교란하라고 지시하죠.
소수인 미요시군은 노다와 후쿠시마 두 요해처에 틀어박혀 치열하게
싸움을 계속했지만 전황은 6만의 다군이었던 오다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이시야마에서 전황을 관망하고 있던 겐뇨는 당황하여 급히 비상종을 울리고
미요시와 오다 양측에 나뉘어 가담하고 있던 사이카패는 그발 밤중으로
모두 이시야마로 입산하죠. 또한 근처의 문도들까지 가세하여
2만여명이 농성하고 있던 혼간지는 하룻밤새에 4만여명으로 늘어납니다.
혼간지로 들어간 사이카패는 절안의 망루에서 오다군에 비오듯 총알을
퍼붓죠.
다음날
엄청난 폭우로 인해 요도가와강이 역류하게 되자 미요시패는 기뻐날뛰며
곳곳의 강뚝을 끊어버리고, 범람하기 시작한 강물은 오다군의 진영을
덮치죠.
당황한 오다군은 무수한 시체를 남긴채 전장에서 잠시 물러서죠.
다음날
오다군은 다시 뻘밥이 된 곳에 무수한 망루를 세우고 다시 공격하기
시작하죠.
전황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오다군은 점점 보급의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이를 감지한 사이카패의 두령 스즈끼 마고이치(스즈끼 시게히데)는
겐뇨에게 출병할것을 건의하죠.
이미 오다군의 진영에서 밤마다 사방에서 염불소리가 들려오고
야음을 틈탄 문도들이 진막에 방화를 하고 우물에 분뇨를 넣는등
분위기가 극도로 안좋았습니다.
인근의 백성들도 신성한 절(?)을 공격하려는 노부나가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죠.
바야흐로 노부나가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다음번엔 노부나가가 맡는 최대의 위기에 대해 쓰도록 하겠습니다.
오타가 많아 죄송합니다. 대강 문맥을 맞춰보시길.......
그럼 이만

제목 : [幸村/기타]× 신장포위망 #11
미요시씨를 물리치려고 노부나가를 불러들인 요시아끼는 그야말로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굴로 들어간 꼴이 되었고,
노부나가에게 이미 모든 권한을 빼았기고, 장군의 권위마저 위태롭게된
요시아끼는 각지의 유력한 대명들에게 각자 싸움을 그치고
교토로 상경하여 노부나가를 물리치라는 밀서를 보냅니다.
이러한 밀서는 겐뇨와 미요시삼인방, 아사이 아사쿠라에게도 전해졌고
마침내 겐뇨는 자신의 적이었던 이들 근기지방의 영주들과
손을 잡게 됩니다.
이전의 혼간지와 대명들의 싸움은 단순한 영지다툼이나 농민 반란
정도의 수준이었지 혼간지 자체를 위험에 빠뜨린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혼간지와 토착세력을 뿌리채 뽑아 버리고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설립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상 유래가 없었던 대적앞에 아웅다웅다투던 이들은 서로 힘을 합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겐뇨와 근기지방의 영주들(미요시가, 아사이가, 아사쿠라가,롯카꾸가등)이
형성한 것이 바로 신장포위강 이었습니다.
그럼 다시 전편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미요시를 공격하던중 뜻하지 않은 혼간지의 반격을 받게된 노부나가는
오도가도 못하는 교착상태에 빠지고, 이를 이용해 겐뇨는
요시카게와 나가마사에게 빨리 출병하여 노부나가의 뒤를 치라는
밀서를 보냅니다.
이윽고 아사이.아사쿠라의 출병소식이 전해지고 노부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의 싸움을 끝내기 위해 사이카패가 빠져나간 노다와 후쿠시마에
맹공격을 퍼붓었습니다.
이때 스즈끼 마고이치(시게히데)가 이끄는 문도병 약 5000이
거적을 두르고 마치 벼를 벼러가는 것처럼 인근의 논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오다군을 시험하기 위한 마고이치의 계책이었고 사이카패는
거적속에 총과 화약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를본 오다군의 삿사 구라노스께(나리마사)는 문도병이 갑자기 들어난
인원때문에 식량이 부족해 벼를 베러가는 것으로 판단하고
마에다도시이에등 10000여의 병력을 이끌고 문도병을 공격하기 위해
나섭니다.
총알을 막기위해 방패를 나란히 들고 몰려오는 오다군에게
사이카패는 숨겨두었던 50알 산탄과 200알짜리 포를 쏘아대고
삼단으로 대오를 짠후 밀려오는 오다군에게 집중사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다가에서 총이라면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던 나리마사(철포B)도
사이카패의 공격에 네고로사의 승병들을 독려하며 맞받아 사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며 사격을 하던 사이카패를 나리마사가 맹추격하고
있을 때 이시야마에선 비상종을 울리고 논두렁 받두렁, 강가, 숲속, 민가
등에 숨어있던 문도병이 사방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오다군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생각한 사이카패는 후퇴하던 부대를 돌려
사격을 했습니다.
앞서서 싸우던 노무라 엣쭈노가미가 적의 집중사격을 받고 쓰러지자
오다군의 대형은 일시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병사들을 독려하던
삿사 나리마사마저 저격수의 총알에 부상당해 실려가게 되자
오다군은 것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오다군은 사방에서 미친듯이 쳐들어 오는 문도병의
칼날에 무수히 쓰러지고 기세가 오른 문도병은 나무아미타불의 정기를
흔들며 오다군의 본진까지 육박 오다군의 본진까지 완전히 태워버리고
맙니다.
다급해진 노부나가는 본진을 뒤로 옮기고 황실에 압력을 넣어
혼간지와 노부나가는 서로 화해하라는 칙서를 얻어냅니다.
노부나가는 이로써 혼간지에서 발을 빼 수 있었지만 그 때 이미
아사이 아사쿠라군은 우사산성으로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아사쿠라의 맹장 야마자끼 요시이에는 우사산성을 공격하여
수비장이었던 모리 요시나리(란마루 아빠,林可成)를 죽이고,
노부나가의 아우였던 노부하루까지 쳐죽입니다.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쳐내려온 아사이 아사쿠라군은 우사산성을 거쳐
교토로 진군해오고, 오다군은 문도병과 합세해 곳곳에서 약탈 방화를
하는 아사이 아사쿠라군과 악전고투를 계속합니다.
아사이 아사쿠타의 교토공격이라는 급보를 받은 노부나가는
문도병과 미요시패의 집요한 추격을 따돌리고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하루만에 교토로 돌아오고, 노부나가의 신속한 귀경에 놀란 아사쿠라는
승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엔랴쿠사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히에이산에 올라가 진을 쳤습니다.
고지대의 적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의 이러한
지구전에 당황하게 되고 이에 힘을 얻은 겐뇨는 각지의 사찰에
불적(노부나가)타도의 서신을 보내 총 궐기를 촉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다군의 주력이 아사이.아사쿠라군의 교토진입을 막기위해 산밑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자 각지의 문도병과 지방영주들은 노부나가의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노부나가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신장포위강 하편을 기대해 주세요.
그럼 이만

제목 : [幸村/기타]× 신장포위망 下 #12
전편에 이어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노부나가는 사실 처음 미요시를 치러 나갈때는
혼간지의 잠재력을 인정 하면서도 내심 그깐 중놈들이 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별다른 지휘경험도 없는 중들이 훈련도 안되있고 군비도
미미한 농민들을 이끌고 과연 뭐 얼마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만도 하죠.
그런데 뜻밖에도 혼간지의 중들은 노부나가가 혼간지를 공격하기도
전에 문도들을 소집하여 맹공을 퍼부었고, 염불만 외는줄 알았던
혼간지의 중들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문도병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여 오다군을 사정없이 밟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스즈끼 마고이치가 이끄는 사이카패의 총알 앞에선
오다군의 역전의 용사들도 무력할 수 밖에 없었죠.
또한 혼간지의 종주 겐뇨는 탁월한 식견과 외교술로 각지의
영주들을 선동하여 사방에서 노부나가를 공격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아사이 아사쿠라를 움직여 노부나가를 궁지에 몰아넣는데
성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노부나가가 이처럼 히에이산 밑에선 아사이.아사쿠라군과 한없는
대치를 하고있자.
겐뇨는 기회는 바로 이때다 하고 이세 나가시마 간쇼사의
파견되있던 방관 시모쓰나 홋교(下門賴旦)에게 비어있는 오와리로
진입해 기후와 교토간의 노부나가의 보급선을 끊으라고 명령합니다.
% 정정 시모쓰나 홋교 -> 시모쓰나 요리아끼
겐뇨의 명을 받은 요리아끼는 약 20000의 문도병을 이끄고
나가시마와 맞서고 있는 오기에성으로 쳐들어 갑니다.
당시 오기에성에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오끼가 성주로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동생이 포위되어 죽게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서도
아사이.아사쿠라군 때문에 지원군을 파견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오기에성은 함락되고 문도병은 오와리와 미노등지에서 봉기하여
오다의 영지는 어디하나 성한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오기에성의 노부오끼와 함께 나가시마간쇼가를 감시하라고 배치했던
다끼가와 가즈마스(龍川一益)는 오히려 문도병들에게 포위되어
꼼짝 못하고 있었고, 오다가의 용장 시바다 가쓰이에도
롯까쿠 쇼테이(六角義賢)가 이끄는 문도병들에게 포위되어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노부나가를 살려준 것은 이에야쓰 였습니다.
이에야쓰는 휘하 10000의 정병을 이끌고 요코야마성등 기후와 교토를
잊는 보급선을 끝까지 사수하여 노부나가의 파멸을 막았습니다.
잇다른 비보로 인해 당황한 노부나가는 아사이 아사쿠라에게
소모전을 그만두고 승부를 가리자는 서신을 보내지만
아사쿠라는 노부나가의 이러한 꾀임에 속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보긴엔 산속에 진을 친 아사이.아사쿠라군이 오다군보다
더 보급에 어려움를 격을 것 같지만, 아사이.아사쿠라군은 엔랴쿠사와
인근 신도들의 도움으로 이미 보급선을 확보해 놓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노부나가는 이번엔 아사쿠라군의 보급선을 끊기위해 별동대를
투입하지만 아사이.아사쿠라의 대군에 밀려 이마저도 실패하고 맙니다.
이도저도 다 막힌 상황에서 노부나가는 요시아끼와 황실에 앞력을 넣어
서로 화해하라는 칙서를 얻어 냅니다.
노부나가는 칙서와 함께 아사쿠라군에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고,
싸운에 지치고 자칫 보급선이 끊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사쿠라는
이 화의안에 동의하고 히에이산에서 내려갔습니다.
혼간지의겐뇨또한 이정도면 힘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해서인지
노부나가가 몰수한 산문령을 모두 돌려받는 조건으로 강화에 응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궁지를 벋어나기위한 노부나가의 계책이었고
요시카게와 겐뇨는 여기에 속아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죠.
만약 요시카게와 겐뇨가 끝까지 화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싸웠다면,
보급이 어려워진 오다군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을 테고, 노부나가는
파멸을 맞고 말았을 겁니다.
하지만 요시카게와 겐뇨는 이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죠.
이리하여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와, 혼간지, 미요시삼인방, 롯카투 쇼테이
등과 각각 강화를 맺고 위기 상화을 탈출합니다.
물론 위기에서 벋어난 노부나가가 강화안에 있었던 조약들을 하나도
지키지 않죠. 아니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공을 시도하기
시작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부나가의 냉철한 판단력와 탁우러한 위기 관리 능력을
옆볼 수가 있었습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노부나가가 진짜 잘했던 것은 싸움이 아니라
외교와 대세판단능력이었죠. 위기에서 노부나가를 구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외교에서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싸움만 가지고 논한다면 사이카패의 스즈끼 마고이치(시게히데)가
노부나가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자들은 단지 국지전에만 능했을 뿐이지, 노부나가와 같은
판단력이나 대세를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결국은 이것이 승부를 갈랐다고 할 수 있겠죠.
다음번에는 다시 힘들 얻은 노부나가의 반격과 농민군에 대해
쓰기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제목 : [幸村/기타]× 농민군의 전술 #13
전국시대 일본의 무기는 흔히 칼에서 창으로 창에서 다시
총으로 옮겨 갔다고들 하죠.
또한 그에따라 전체적이 포진과 전술도 달라지게 됐죠.
전국시대 이전 그러니까 고대와 중세의 일본무사들의 싸움은
싸움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또 그 당시의 싸움은 잡병이 거의 없었고, 주로 무사들의 일대일
승부로 싸움의 승패가 갈렸죠.
중무장한 상태에 말을타고 나온 무사는 적당한 상대를 골라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힙니다. 이걸 나노리라고 하죠.
상대편 무사는 나노리를 외친 무사가 자신의 상대가 될만하다고 생각하면
같이 나노리를 외치고 싸움에 들어갑니다.
두 무사는 일단 원거리에서 활을 쏘는 것으로 싸움을 시작하죠.
하지만 대개의 경우 거리가 너무 먼데다가 중무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재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화살에 죽는 무사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본격적인 전투는 서로 화살을 두어발 쏜 후에 칼싸움으로 시작되죠.
물론 말을 탄채로 싸웁니다.
이런식으로 싸워서 하나가 말을맞고 말에서 떨어지면 이긴 무사는
재빨리 달려가 상대방의 목을 예리한 단도로 잘라내죠.
그리고는 나 아무개가 누구를 죽였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목을 말에 메단후 또다른 상대를 찾아 싸움을 벌이죠.
어떻게 보면 중세 유럽의 기사들의 모습과도 거의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식의 전통적인 싸움은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상당히 변모하죠.
개인의 무용과 명예를 중시하던 전술에서 이제는 무슨 수를 쓰든
이기면 그만이라는 전술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싸움의 양상이 너무 치열 했기때문에 이제는 무사뿐만 하니라
잡병들까지 고용하여 싸움이 전체적으로 대규모화 됐죠.
또한 과거의 전투에선 상대방을 뒤에서 공격한다든가, 목을 베고있는
상대를 공격한다던가, 아니면 숨어서 공격한다던가 하는 일은
대단히 비겁한 행위로 생각됐기 때문에 그런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에 반해 이제는 정식 무사가 아닌 아시가루(足輕, 잡병)들이
싸우게 되어서 뒤어서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숨어서 공격하는 경우도
대단히 많아 졌습니다.
또한 개임위주의 전술에서 집단위주의 전술로 바뀌는 과정에서
칼을 잘 다루지 못하는 아시가루들이 창을 무기로 사용하여
밀집대형을 이루고 적을 공격하는 전술이 발달하여 바야흐로
창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15세기에 총이 도입되고부터는 더더욱 싸움이 근대화 되가기
시작했습니다.
창이나 특히 총은 사정거리가 칼에비해 길었기 때문에 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가시노 전투의 예를 들어 노부나가가 일본의
전술을 변화시켰다고 하시는데 전 노부나가보다는 오히려
농민군이 일본의 무기와 전술의 변화에 앞장섰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농민군이란 주로 혼간지의 문도병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어떻게 싸웠던 것일까요?
첫째로 이들은 종래의 무사들과는 생각자체가 달랐습니다.
무사들은 보통 들판이나 아니면 성에서 정면 승부로써(당시까지도)
승부를 가렸죠.
하지만 농민군들은 훈련도 부족했고 장비또한 부족했기 ㄸ문에
평소엔 그냥 평범한 농민으로 지내다가 밤이 되거나 전황이 어지러워 질때
곳곳에서 출몰하여 유격전을 펼치는 방법을 썼죠.
때문에 훈련이 잘 된 오다군도 사방에서 출롤하는 농민군을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농민군이 무사들고 다른 또하나의 특징은 바로 비겁하다는데(?) 있습니다.
농민군이나 사이카패는 말탄 기마무사(장교급)를 공격할 때
무사를 공격하기보다는 오히려 말을 공격헀습니다.
이건 중세 이전의 전투에선 금기시 되었던 아주 비겁한 행동이라고
할 수있죠.
당시의 무사들은 훈도시와 하오리부터 시작하여 십여개가 넘는 갑옷과
각종장신구, 기본적으로 길고짧은 칼 두자루와 그밖에 단도 여러자루
거기다 활과 전통까지 메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말에서 떨어질
경우에는 일어서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중무장은 말을 타고 있을 경우에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일단 떨어져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죠.
당시의 농민군을 이점을 노려 사람보다는 오히려 말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일단 말에서 떨어진 무사는 기동력에서 앞선 아시가루들의 밥이 되고
말아버리죠.
또한 총이 본격적으로 쓰인 이후부터는 솔직히 갑옷이 별 의미가
없어져 버렸죠. (화살은 막아도 총은 못막으니까요)
농민군의 또다른 특징은 이들이 속임수를 상당히 잘 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에스끼 겐신의 아버지로 에치고를 호령했던
나가오 다메가게(長尾爲景)도 반란을 일으킨 농민군고 싸우다
함정에 빠져 어이없이 죽고 말죠.
또한 이들은 겉으로 볼때는 병사라는 티가 전혀 나지 않기 때문에
곳곳에 숨어서 상대가 배후를 친다든가 하는 일에 매우 능했습니다.
그러나 오합지졸인 농민군이 전국최강의 오다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것은 이런 이유만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거기엔 또하나의 이유가 있었죠.
그것은 바로 그들이 노부나가가 나오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로 싸웠던
각지의 대명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농민군의 용맹과 무사들의 지휘력이 결합됐다고나 할까요.
사실 오다군을 공격한 농민군중 순전히 농민군만으로 구성됀 부대는
없었습니다.
에찌젠의 농민군은 아사쿠라와, 북오미의 문도병은 아사이와,
남오미의 문도병은 롯카쿠와 각각 연합하여 오다군을 체계적으로
공겨했기 때문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농민군(문도병)들의 또하나의 강점은 그들의 지휘관 이었던 중들이
염불만 외는 그런 중은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당시의 중들은 어려서 부터 중이 된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직업을(무사, 용병, 도적등등)가지고 있다가
중이 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또한 큰 죄를 짓고 피신다니거나 갈곳이 없는 떠돌이 낭인들도
절에 들어오는 경우가 상당이 많았습니다.
다시말해 문도병들을 지휘했던 중들은 단순한 중들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로 나가시마 간쇼사의 문도병을 시모쓰마 요리아끼와 함께
지휘했던 핫토리 사쿄노스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전직이 중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었습니다.
(핫토리씨가 뭐해서 먹고사는지는 다들 아시겠죠.)
사실 그는 그 지방의 호족이었죠.
이렇게 싸움에 능한 중들이 문도병을 이끌었기 때문에
오다군은 그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더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농민군의 정신입니다.
일본의 농민은 사실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 였습니다.
무사계급에게 철저히 수탈당하고 때로는 그들의 눈먼칼에 어처구니 없이
희생되는 경우도 많았죠.
으으 그만 쓸께요. 오늘은 너무 많이 쓴거 같아요.
오타 많은거 보면 아시겠지만 전 타수가 형편 없답니다.
오타는 적절히 생각해서 봐주세요.
그럼 이만

제목 : [幸村/기타]× 노부나가의 나가시마 공격 #14
사방에서 포위공격을 해오던 잇끼들과
아사이.아사쿠라등의 무리를 칙서를 이용해 격퇴한 노부나가는
곳바로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번째 대상은 바로 노부나가가 히에이산 밑에서
아사이.아사쿠라와 대치하느라 여념이 없는 틈을 타
동생 노부오끼를 죽인 정토진종의 또 하나의 대찰인
나가시마 간쇼사 였습니다.
나가시마 간쇼사는 이세의 대찰로 기소강과 나가라강으로
둘러쌓인 일종의 하중도(河中島)였습니다.
강으로 둘러쌓인 만큼 공격하기도 대단히 어려운 지형에
있었죠.
당시 간쇼사에는 약 20000여의 문도병이 있었는데
이 숫자는 노부나가가 나가시마를 공격하기위해 출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가시마 간쇼사의 문도병들은 혼간지에서 파견나온
시모쓰마 요리아끼와 간쇼사의 주지인 핫토리 사쿄노스께에의해
지휘되고 있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 시바다 가쓰이에등
정예군 5만을 이끌고 나가시마방면으로 출진했습니다.
하지만 나가시마에 다다랐을 무렵부터 비가 퍼붓기 시작하여
들판은 옹통 뻘밭으로 변했고 나가시마 주변의 하천들까지
범람하여 공격이 거의 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비는 그칠줄 모르고 잇끼들의 무리들은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씩 노부나가는 마침내 근처의 마을을
불지르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마침내 노부나가와 사쿠마 노부모리는 본진을 이끌고 퇴각하고,
시바다 가쓰이에와 양자 가쓰토요, 안도 나오모리, 우지이에
보쿠덴등이 이끄는 2만여의 병력이 마지막으로 퇴각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부나가는 내심 퇴각시의 잇끼들의 공격을 우려했지만,
오다군의 본진이 다 퇴각할까지도 잇끼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가쓰이에는 잇끼들의 이러한 소극적인 전법을 비웃으며 퇴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오다군이 강변을 지날무렵 강가의 수풀속에서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며 사방에 잠복해 있던 잇끼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노련한 시바다군은 곳 총소리가 울린곳으로 달려가 잇끼들을 물리쳤지만
이번엔 다시 앞쪽 산에서 잇끼 무리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오기 시작했고 본산에서 지원나온 사이카패까지 가세되어
무수한 총탄을 퍼부으며 시바다군의 전후좌우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좌충우돌하는 시바다군앞에 잇끼들은 점점 늘어가기만 하고
마침내 앞에서 분전하던 가쓰이에가 총알을 맞고 실려가게 되자.
오다군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됐습니다.
가쓰이에 대신 지휘를 맡은 안도 나오모리는 능숙하게 지휘를 하며
후퇴를 계속했지만 잇끼들은 마치 파리떼처럼 물러갔다간 다시 쳐오고
다시 물러갔다고 또 다시 공격해 오는등 오다군을 끈질기게
따라 붙으며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이윽고 안도 나오모리 마저 부상을 당하자 이번에 우지이에 보쿠덴이
지휘를 맡게 되었고, 우지이에 보쿠덴은 안개속에서 잇끼들에
포위되어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지휘관 세명이 모두 죽거나 부상당한 상태에서 오다군은
거의 괴멸상태가 되었고, 오다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고
나가시마에서 휴퇴해 기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가시마의 잇끼들은 어떻게 오다군의 정예5만을
맞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상대는 오다군 제일의 용장인 시바다가쓰이에와
미노 삼인방으로 이름을 떨치던 안도 나오모리, 우지이에 보쿠덴
등이었는데 말입니다.
일단 병력면에선 나가시마의 문도병의 숫자도 오다군 못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나가시마쪽 사방에 숨어있는 문도들이라는
플러스 알파가 있었죠.
또한 근처의 강가에 사는 어부, 들무사, 농민들 그리고 이세지방의
호족들도 모두 혼간지와 뜻을 같이 하여 노부나가와 맡서
싸웠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유일한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정토진종을 짖밟으려는 노부나가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이들이 노부나가에
그처럼 거세게 저항했던 것일까요?
거기에 또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가시마 간쇼사 일대는 혼간지의 사령으로써 오랫동안 봉건영주의
지배를 받지 안았던 지역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간쇼사의 중과 인근의 문도들이 힘을 합쳐
영주를 몰아냈다고 할 수 있겠죠.
자시말해 이곳은 간쇼사의 중들에 의해 사실상 다스려 지고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때문에 만약 간쇼사가 패하게 된다면 인근백성들은 또다시 무사들의
학정에 시달려야 되는 거였죠.
농민들은 바로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혹한 무사들의 통치보다는 그들에게 심적인 안정과
내세의 희망을 주는 정토진종의 통치를 원했던 거죠.
노부나가와 혼간지의 갈등은 바로 무사계급과 일반백성들의
갈등이었던 것입니다.

제목 : [幸村/기타]× 히에이산 화공 #15
히에이산의 엔랴쿠사는 일본 천태종의 본산으로써 과거 귀족정치시대부터
거의 1000년가까이 내려오는 대찰이었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일본의 초기 불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귀족불교였고,
그 귀족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 바로 이 엔랴쿠사였습니다.
때문에 과거 귀족시대에는 그 위세가 어마어마 했죠.
때때로 귀족들과 영지다툼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엔랴쿠사의 중들은
절의 신기나 위패등을 가지고 황궁으로가서 시위를 하죠.
그럼 대부분의 경우는 황실과 귀족들이 엔랴쿠사의 위엄에 굴복했다고 합니다.
엔랴쿠사가 이러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왕법과 불법이 하나라는
이론에 있었죠. 다시말해 불법이 흥해야 왕법도 흥한다는 것이죠.
또한 엔랴쿠사가 계속해서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기 때문에
황실이 유지된다는 좀 어이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엔랴쿠사는 황실과 귀족들로부터 막대한 시주를 받았고,
엄청난 사령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엔랴쿠사도 황실과 귀족이 몰락하고, 무사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부터는 점차로 쇠퇴해 가죠.
그 많던 사령도 대명들에게 거의 다 빼았기고, 정토진종이나 법화종같은
새롭고 혁신적인 종파들에 의해 교세도 많이 약화되죠.
하지만 부자 망해도 3년 간다는 말이 있듯이 그때까지도 엔랴쿠사는
막대한 재산과 사령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일례로 오오미의 경우엔
거의 1/3을 엔랴쿠사가 사령으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엔 노부나가에게 거의다 빼았긴 상태였지만요.
우리는 여기서 벌써 노부나가와 엔랴쿠사가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사이씨나 롯카큐씨같은 노부나가 이전의 오오미의 주인들은
비록 쇠퇴하긴 했지만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며 황실을 수호(?)하는
엔랴쿠사에 대해 항상 저자세를 보이며, 그들의 기득권과 사령을
보호해 주었던 것에 반해, 노부나가는 엔랴쿠사의 사령과 기득권을
가차없이 몰수하고 엔야쿠사의 비호를 받으며 장사를 하던 호나이상인의
기득권까지도 ㅃ았았던 것입니다.
막말로 이런 상태에서 엔랴쿠사가 노부나가와 아시좋게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연유로 해서 아사이 아사쿠라는 지난번의 노부나가와의 싸움때에
바로 이 히에이산으로 올라가 엔랴쿠사와 합세해 진을 쳤던 것입니다.
이 때 노부나가는 엔랴쿠사에 아사쿠라등을 산에서 내려보내면
빼았았던 사령을 돌려주겠다는 아주 속보이는 서신을 보냈다 퇴짜를
맞기도 하죠.
어찌ㄷ든 싸움끝에 노부나가는 각 사찰의 사령을 모두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습니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언제 약속 지키는거 봤습니까?
약속이 중요한게 아니라 힘이 중요한 거죠.
일단 위기에서 벋어난 노부나가는 사령을 돌려주기는 거녕 오히려
각지에 관문을 설치해 문도들의 통행을 막고 아사쿠라와 혼간지간의
교통로를 완전히 막아버리죠.
또한 영내의 사찰세력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계속합니다.
지난번의 앙갚은이라고 할 수 있는 나가시마 간쇼사공격에서 참패를 당한
노부나가는 이번에 히에이산의 엔랴쿠사를 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사실 싸움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것이었죠.
엔랴쿠사는 대중성이 약했기 때문에 문도병도 거의 없었고,
당시 히에이산에는 각종 중들(전투승,학승,막일꾼)과 인근 주민들까지
몇천명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히에이산을 노부나가는 대군으로 포위하고 밑에서부터
불을 지르며 올라가죠.
당황한 중들과 인근 백성들은 계속해서 산 위로 쫓겨 올라가고,
살육에 광분한 오다군은 이들을 무참하게 죽이며 계속해서
산위로 올라갔습니다.
결국 오랜세월을 토해 세워진 불당들은 모조리 타 없어지게 되고,
이른높던 중들과 인근의 죄없는 백성들도 모조리 죽게 됩니다.
노부나가는 이로써 교토근처의 우환거리를 하나 덜게 되죠.
하지만 이 작전이 과연 노부나가에게 플러스 요인만 있었겠는가에 대해선
전 좀 회의적입니다.
첫째로 이 사건을 통해 노부나가가 크게 인심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쇼토쿠태자가 삼법을 강조한 이래로 불교는 일본의
가장 중요한 종교였고, 중들은 영주마저도 함부로 죽일 수 없을 만큼
신분이 높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부나가는 다른절도 아닌 바로 황실의 안녕을
비는 엔랴쿠사를 송두리쳐 태워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에 눈에 노부나가가 악귀처럼 보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죠.
두번째로 정토진종의 반 노부나가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시야마에서 히에이산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있던 겐뇨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제 생각엔 아마도 겐뇨는 노부나가와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히에이산이 불타는 광경을 본 정토진종 신자들은 또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여기서 물러스거나 노부나가에게 패하면 혼간지도 엔랴쿠사와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처럼 이 사건이후 노부나가와 그의 적들의 원한관계는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하나더 여기서 우리는 노부나가의 잔혹한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히에이산의 중들이 아무리 타락했다 하더라도 그 절 자체는
오랜 세월을 내려온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그 모든것을 송두리채 태워버렸죠.
과연 이러한 방법만이 히에이산을 제압하는 방법이었을까요?
온 산을 다 태우고 무고한 인명까지 모조리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까요?
이 문제는 한 번 생각해 봐야할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제목 : [幸村/기타]Ξ 신겐의 준동 #16
노부나가 연재는 제가 나우누리 신장동에서
15회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어쩌다 보니 중간에 끊기게 됐죠.
앞으로는 여기서 다시 연재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군대가기전까지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히에이산 화공은 신장포위망에 대한 노부나가의 반격의
신호탄 이었습니다.
엔랴쿠사의 몰락으로 인해 포위망이 상당히 약화되었죠.
노부나가는 히에이산 화공에 이어 곧바로 숙적 아사이.아사쿠라씨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아사이.아사쿠라씨와 겐뇨는 신겐에게
빨리 출격할것을 재차 요청하죠.
하지만 강력한 군단을 가진 명장 신겐도 에치고의 겐신과
사가미의 호조 우지야쓰라는 강적들에 둘러쌓여 있어서 움직이기가
용이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쇼운, 우지쯔나에 이어 3대째 관동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호조 우지야쓰가 57세(확실치 않음)의 나이로 죽죠.
그 뒤를 이은 4대 우지마사의 아내는 신겐의 딸로써 다께다씨와
호죠씨는 급속히 친해지게 됩니다.
그 전의 얘기를 좀 하자면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허무하게
죽은 후 신겐은 주인을 잃은 이마가와가를 공격할 절호의 찬스라고 보고
일전에 맺었던 삼국동맹(가히,쓰루가,사가미)을 장남 요시노부를 죽여
가면서까지 깨고 쓰루가를 장악하죠.
신겐는 또한 곧이어 이마가와로부터 독립한 이에야스와 밀약을
맺고 도오도오미를 반씩 나눠가지죠.
이때 호죠우지야스는 동맹을 일방적으로 어긴 신겐을 비난하며
우지자네를 돕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이로써 신겐은 가히, 시나노, 쓰루가, 신슈의 절반, 도오도오미의 절반
이렇게 5개국에 걸친 100만석을 상회하는 대영주가 되었죠.
이런식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신겐은 곧이어 이에야스가
차지하고 있던 도오도오미의 난공불락의 성 다까텐진(高天神)성을
공격하지만 성이 워낙 견고한 탓에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가이로 돌아가게 됩니다.
또한 신겐과 사실상 동맹을 맺은 호죠우지마사는 나름대로 관동지방의
영토를 계속해서 확장해나가기 시작합니다.
다음번엔 노부나가와 그의 최대 숙적인 아사이.아사쿠라씨의
마지막 싸움을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노부나가의 아사이 공격 #17
히에이산을 붙태움으로써 포위망의 일각을 허무러뜨린
노부나가는 본격적인 아사이 공격에 착수합니다.
5만이 넘는 오다군에 나가마사는 싸울 힘을 잃고
오다니산성에 농성하면서 아사쿠라와 혼간지에 원군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노부나가역시 비록 군대는 앞도적으로 많았으나
오다니산성이 워낙 견고했기 때문에 바로 공격을 감행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노부나가의 군대가 이처럼 북쪽으로 향하자 남쪽에서는
자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역시 마쓰나가 히사히데였죠.
오다군이 아사이공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사이 히사히데는
미요시 요시쓰구와 함께 반란을 일으킵니다.
사실 히사히데와 요시쓰구의 반란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노부나가가 입경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나이는 미요시삼인방과
히사히데의 각축장이었습니다. 미요시 요시쓰구는 그때까지도
일족인 삼인방의 힘에 눌려 가독의 계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죠.
때문에 요시쓰구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 입경시 그의 힘을 빌려
미요시 삼인방을 몰아내려 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노부나가의 힘으로 미요시 삼인방을 시코쿠의
아와로 몰아내는데 성공하죠.
하지만 그들의 손으로 돌아오길 기대했던 기나이의 패권은
이미 노부나가의 것이었죠.
더군다나 그들은 노부나가의 완전한 신하도 아니였기 때문에
변변한 영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얻은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거죠.
불만에 차있던 그들을 부추긴 것은 역시 장군 요시아끼와
혼간지 겐뇨였습니다.
요시아끼와 겐뇨는 노부나가가 오오미로 출진해 있는 지금이
오다를 공격할 적기라고 말하며 히사히데와 요시쓰구를 설득했고,
이들은 다까야성, 시기산성, 다몬산성등에서 일제히 반 노부나가의
기치를 올립니다.
이들의 공격에 노부나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 많은 성들이
떨어지고 반란군은 기세를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노부나가가 아니죠.
노부나가는 오다니성을 포위해 놓은 채 군대를 이끌고 히사히데와
미요시 군을 공격합니다.
이때 겐뇨는 아사쿠라에게 서둘러 오오미로 출진하여 노부나가의
뒤를 칠것을 종용하지만 요시까게는 끝내 출병하지 않죠.
남북의 협공이 이루어질것으로 기대했던 히사히데는 요시까게가
계속 출병하지 않자 서둘러 후퇴해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요시까게는 왜 이러한 호기에 출병을 주저했을까요?
가장 간단한 대답은 역시 그가 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한
무장이었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다른 면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사쿠라는 그때까지 노부나가와 세번의 큰 싸움을 벌였습니다.
첫번ㅉ 가네가사끼의 싸움에선 아사이가의 도움으로 오다군을
대파할 수 있었죠.
두번째 아네가와 전투에선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에게 엄청난
패배를 당합니다. 아사쿠라가의 정예병사들이 이 싸움에서
거의 전멸하죠.
세번째 싸움은 신장포위망 형성시 히에산이 진을 치고 오다군과
싸운 것이었습니다. 이싸움에선 별다른 큰 접전없이 서로 물러서게
되죠.
여기서 우리는 아사쿠라군이 노부나가와의 싸움에서 거의
대부분 노부나가의 본진과 맞붙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혼간지의 문도병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점수비에서나
강한 것이지 야전에는 아주 약했습니다.
훈련도 못받은 문도병들이 진을 치고 싸우는 야전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가 있겠습니까?
때문에 겐뇨는 항상 아사쿠라 군으로 하여금 오다의 본진과 대치시키고
그 틈을 이용해 다른 곳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차례의 싸움으로 인해 아사쿠라가가 받은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죠.
요시까게가 쉽게 출병하지 않은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던 남북협공의 불발로 모처럼 일었던 반 노부나가의 기치는
꺾기고 노부나가는 다시 아사이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부근의 지성이 차례로 점령당하고, 믿었던 부하들이 하나둘씩
오다가로 붙는 상황에서 나가마사는 어쩔 수 없이 요시까게에게
원병을 청하게 됩니다.
겐뇨의 요청에도 출병하지 않았던 요시까게 였지만 오랜 맹우인
아사이씨의 요청은 거부할 수 없었죠.
천상기에선 엄청나게 무능하게 묘사된 요시까게 였지만,
아사이씨가 망하면 아사쿠라도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이윽고 요시까게가 직접 이끄는 2만의 군대가 오다니성에
도착하게 되고 아사쿠라군은 오다니성옆의 산에 진을치고
오다군과 대치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양쪽의 병력 비교를 해본다면...............
오다군 약 5만
아사이군 약 5000~6000 아사쿠라군 약 2만
양쪽의 병력차가 거의 두배정도 나죠. 아사쿠라.아사이쪽에
잇꼬잇끼라는 플러스 알파가 있긴 하지만 형세는 역시
오다군쪽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만약 이런상황에서 히사히데군과 미요시군이 건재했다면
오히려 아사쿠라쪽이 유리했을 수도 있겠죠.
다음번엔 노부나가의 숙적 아사이.아사쿠라씨의 최후를 다루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미카타가하라 합전 #18
제가 요즘 公(위생병시험 망치고), 私(감기)가 다 亡해서 글을
못 올렸습니다. 양해해 주시길..............
미카타가하라합전은 더 설명을 드릴 필요가 없는 유명한 전투로
이곳 전클 회원님들은 아마 대부분 자세히 알고 계실 겁니다.
때문에 합전의 내용보다는 주변의 정세에 초점을 맞춰서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신겐의 상경을 가장 독촉한 것은 바로 겐뇨였습니다.
겐뇨는 아사이.아사쿠라만으론 도저히 오다를 막아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신겐의 상경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신겐은 그때마다 우에스끼와 호조라는 강적이 배후에 있기때문에
당장 상경하기가 어렵다고 하며 시일을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호죠씨의 동량이자 관동에서 무적의 위세를 자랑하던
호죠우지마사가 죽고 그의 아들인 우지마사가 집권하게 되자,
호죠씨와 다께다씨는 급속히 친밀해 졌고, (우지마사와 다께다씨는
사돈간이었죠.) 우에스끼씨는 겐뇨의 농간으로 안해 봉기한 ㅇ쥬, 에치고
등지의 잇끼군때문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습니다.
겐뇨는 신겐에세 서찰을 보내 신겐이 상경한다면 신슈방면으로
쳐들어오는 우에스끼군은 자신이 문도들을 동원해 반드시 막아주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이런식으로 양쪽의 강적을 덜은 신겐은 자신의 군세 약 25000~30000에
호죠씨의 원군 수천을 얻어 이에야스의 영지인 도오도오미로 쳐들어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이상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겐의 상경은 곧 노부나가와의 일전을 의미합니다. 또한 겐뇨와 요시아끼등
반 노부나가파가 바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장군 요시아끼는 노부나가와 신겐이 피터지게 싸워 둘다
나가떨어지길 기대 했는지도 모릅니다.
신겐이 노부나가와 싸우는 가장 빠른길은 시나노로부터 기소계곡을 지나
동미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미노는 노부나가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기후성이 있는 곳이니
다께다군이 미노로 들어온다면 노부나가로서도 직접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을겁니다.
하지만 신겐은 이러한 직접적인 공격루트를 마자한 채 먼저 이에야쓰를
공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겐의 성격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신겐은 도오도오미고 침공하면서도 노부나가와의 동맹은(당시까지
오다와 다꼐다는 동맹중이었습니다.) ㄲ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이에야쓰를 멸망시키기 전까지는 오다를 적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겡의 주도면밀함과 교활함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신겐은 파죽지세로 도오도오미내의 이에야쓰측 성을
함락시켰고 이에야쓰는 몇번 요격후 여의치 않다도 생각했는지
하마마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이미 오다의
원군은 당도해 있었죠.
하지만 오다의 원군은 너무나도 형편없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희 10개국
이상의 영지와 10만이상의 군대를 보유한 대다이묘의 원군으로는
보이지 않았죠. 주장은 사쿠마 노부모리였고 수는 약 3000정도 였으니까요.
제가 이에야쓰였다면 전 아마 이 상황에서 노부나가를 크게 원망했을 겁니다.
아네가와 전투때 약 5000의 병사를 직접 이끌고가 승리의 길잡이가
신장포위망시 전군을 동원해 보급선을 지켜준 맹우 이에야쓰에게
보낸 원군이 고작 3000이라니.............
이것은 도저희 신겐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군세가 아니었습니다.
병력차가 거의 세배정도 되었죠.
이에야쓰군 : 오다군 원군합쳐 약 11000(8000 + 3000)
다께다군 : 호죠 원군합쳐 약 30000이상
때문에 이에야스는 다께다군이 도오도오미를 온통 휘젖고 있는 상황
에서도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던 겁니다.
영주인 이에야쓰가 이처럼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도오도오미의
소호족들은 차례로 신겐에게 투항하게 되었고,
신겐은 이에야쓰를 끌어내기 위해 하마마쓰를 뒤로한채 미까와로
진군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된 이에야쓰는 휘한 전 병력을 이끌고
미카타가하라에서 다께다군을 급습(?)하지만 결과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이에야쓰의 참패로 끝나고 맙니다.
이에야쓰는 간신히 목숨은 보존하여 하마마쓰로 퇴각하지만
거의 재기하기 힘들정도의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신겐은 미카타가하라의 승전을 발판삼아 미까와의 노다성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은 왜 신겐이 거의 숨이 끊어져가던
이에야쓰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느냐 인데.... 몇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는 신겐이 이에야쓰의 전력을 과대 평가하여 하마마쓰공격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기 ㄸ문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한후 이에야쓰를 항복시키려 했다는
것인데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좌우지간 하마마쓰 공격을 여러 신하들이 건의 했지만
신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겐이 노부나가를 공격할 수 있는 루트를 두가지로
설명했는데........ 신겐이 그중 도오도오미쪽의 루트를 선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ㅉ로 기소계곡을 따라 동미노로 직접 쳐들어 갔을 경우
자칫 오다의 정예대군(오와리, 미노패) 5만과 정면대결을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이라면 신겐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겠죠.
또 이경우엔 이에야쓰에게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대단히 위험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겠죠.
반면에 도오도오미쪽의 공격은 비교적 손쉬운 감이 있습니다.
이에야쓰가 노부나가의 비호아래 신진세력으로 크게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신겐에 비할바는 아니었죠. 때문에 신겐은 보다 손쉬우면서
또 많은 영지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전을 전개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또하나 살펴 볼 것은 다께다군의 병력동원 능력인데
그다지 대단치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신겐의 영지는 가히, 시나노, 신수의 절반, 도오동미의 절반
이렇게 모두 합쳐 약 3개국 정도인데 대부분이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총 병력동원 능력은 대단치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신겐의 영지를 약 100만석으로 잡고 1만석당 300명이로 환산한다면
총 병력가능 인원은 30000정도죠.
거기에서 우에스끼 방면의 수비군을 제외한다면..............
글쎄요... 모르긴 몰라도 외부공격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25000을 넘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이 병력으로 노부나가와 정면승부를 편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겠죠.
때문에 신겐은 오다가 아사이.아사쿠라쪽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틈을 타 이에야쓰의 영지를 집어 삼키려고 출진했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다음엔 신겐의 죽음과 그에따른 정세 변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타가 너무 많아 죄송합니다.

제목 : [幸村/연재]Ξ 요시아끼의 거병 #19
마카타가하라의 합전은 반 노부나가진영엔 가뭄끝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도오도오미에서의 이 승리가 급박한 오오미의 전황에
무슨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희망을 잃어가던
근기지방의 반 노부나가측 영주들에겐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요시아끼의 기쁨은 대단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끌어들인 신겐이 이에야쓰를 대파하고 곧 상경한다는
서신을 보내오자 크게 기뻐하며 이젠 자기 스스로가 군대를 이끌고
노부나가를 치겠다고 공헌합니다.
당시까지 아직 요시아끼는 공식적으로 노부나가를 적대시 하지는
않았었죠.
하지만 이름뿐인 征夷대장군인 요시아끼에게 병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기껏 모은 병력이래 봤자 수천에 불과했죠. 그나마도 대부분
급하게 모은 오합집졸에 불과했습니다.
더군다나 큰문제는 바로 내부에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누구보다도
충실히 요시아끼를 섬겨 왔던 호소까와 후디타카가 이미 오다쪽과
내통하고 있었던 겄입니다. 후지타카를 오다쪽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그 자신도 일전에 막신에서 오다의 가신으로 변신한 미쓰히데였습니다.
요시아끼측의 핵심 참모인 후지타카에 의해 모든 정보는 이미
노부나가에게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최후까지 요시아끼와 맞서려 하지않고 원만한
타협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이유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판도가
환전히 성립되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장군을 죽인다면 자칫
천하 무사들의 인심을 잃을 우려가 있다고 봤기 ㄸ문입니다.
(근기지방에서의 장군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졌지만 구식인
지방 무사들에겐 장군은 아직까지도 대단한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이성을 상실한 요시아끼는 노부나가의 이러한 타협책을
무시한채 거병을 단행합니다.
이에 크게 화가난 노부나가는 휘하 정병으로 하여금 요시아끼를
공격하게 하고, 요시아끼는 니조성을 버린채 인근의 수비하기 좋은 작은
성으로 옮기지만 결국 오다군에 허무하게 패배하고 맙니다.
요시아끼는 장남 요시히로를 볼모로 바치고 겨우 목숨을 보존하죠.
요시아끼가 이끌던 군대의 장군들은 대부분이 막신들로써 명목상으론
다들 엄청난 직위를 가지고 잇었지만 실전에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노분나가는 요시아끼 뿐만 아니라 그에 동조해 일어났던 영주들도
이때 가차없이 처단하죠. 또한 이번기회에 뭔가 한껀 해보려 했던
미요시와 마쓰나가 일당도 노부나가의 신속한 대응에 놀라
꼬리를 감추고 맙니다.
이당시 신겐은 열심히 미까와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뜻밖에도 그의 병세가 악화되 공격이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짐나 그 와중에서도 신겐은 요시카게에게 편지를 보내
곧 미까와를 제압하고 오다를 칠테니 빨리 오오미로 출진하라고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겐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세는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여러차례 졸도하고 피를 토한 신겐은
결국 가쓰요리의 지휘하에 가히로 퇴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겐은 본국에 도착하기도 전 결국 5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 이때 신겐이 죽지 않았다면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거라고 생각 했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신겐이 죽은 나이 52세는 당시로 볼때는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간혹 80~90세를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평균연령을 따진다면.....
글쎄요. 한 30정도 됐을까요?
더구나 신겐은 이미 출진하기 전부터 몸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신겐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출진을 결심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전국시대의 명장 신겐은 가쓰요리의 아들 노부까쓰에게
가독을 상속하고(노부까쓰가 16세가 될ㄸ까지는 가쓰요리가
대리 통치) 숨을 거둡니다.
(신겐도 가쓰요리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 모양이죠...)
다께다군은 신겐의 죽음을 철저히 비밀로 했지만 결국 이 사실은 곧
이에야쓰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에야쓰는 곧 다께다군에 빼았겼던 영지를 회복하죠.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숫자상으로 본다면 다꼐다군은 한명의 노인이 병사했을 뿐인데
전세는 이렇게 엄청나게 뒤집어지니.............
아무튼 역사속에서 한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다음번엔 아사쿠라라 아사이가의 최후를 다뤄 보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아사이.아사쿠라의 최후 #20
이제 저의 연재도 슬슬 끝나가는 것 같군요.
사실 아사이.아사쿠라가 멸망한 뒤에는 별로 관심이 가는 대목이
없으니까요. 그만큼 이 두가문과 노부나가의 관계가 밀접했다고나
할까요..............
신겐의 죽음으로 노부나가는 큰 짐을 덜게 되었고, 다시
오다니성에 농성하고 있는 나가마사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에찌젠의 요시카게가 나가마사를 구원하기 위해
출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죠.
여기서 잠시 전력비교를 하자면
아사이군 : 약 3000 ~ 4000 (잇다른 패배로 전력이 급감했죠)
아사쿠라군 : 약 20000 (요시카게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전력이
었습니다.)
오다군 : 약 30000 ~ 40000 (물론 이 이상의 병력도 동원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본
모양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곳에도 아직
적이 많았으니까요.)
병력면에서도 이미 아사이.아사쿠라군은 오다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싸움은 의외로 대단히 싱겁게 끝나고 맙니다.
오다군은 기습적인 작전으로 오다니성 주변의 성채를 공격하여
아사쿠라군과 아사이군이 합류하는 것을 막고, 에찌젠으로부터 오오미까지
진군하느라 피로해진 아사쿠라군을 맹렬히 공격하죠.
아사이와의 연합작전에 실패한 요시카게는 전의를 상실한채
패주를 거듭하고, 2만여의 아사쿠라군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집니다.
요시카게는 본성인 기타노쇼성까지 도망치지만 이미 그를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죠.
실의에 빠진 요시카게는 일족인 아사쿠라 가게아끼의 성으로 피신해
마지막 결전을 꾀하지만, 가게아끼가 노부나가에게 내통하고 있었기
있었기 ㄸ문에 결국 그곳에서 할복하고 맙니다.
에찌젠의 대영주답지 않은 처참한 죽음이었죠.
이로써 오다가와 아사쿠라가의 끈질긴 악연은 끝나게 됩니다.
아사쿠라가와 오다가는 둘다 아시카가 막부ㄸ의 강력 한 가문이었던
시바씨의 피관이었죠. 당시 시바씨의 영지는 에찌젠과 오와리 두곳에
있었습니다. 영지가 분산되 있었죠. 그러던것이 오오닌의 난 이래로
시바씨의 힘이 약해지자 오히려 시바씨의 부하였던 아사쿠라나
오다와 같은 가문들이 영지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아사쿠라가는 가가에서 도가시씨를 전복시킨 잇꼬잇끼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에찌젠의 실질적인 주인으로써 자리를 잡게 되죠.
오다가는 아사쿠라보다는 좀 늦었지만 노부히데와 노부나가라는 걸출한
영주의 출형으로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됩니다.
아사쿠라가는 이러한 신생세력인 오다가를 본래 자신보다 지체가
낮았던 신하라 하여 멸시하고, 오다가는 아사쿠라를 주가인 시바씨를
배신한 역신이라고 경원시 했습니다.
때문에 아사쿠라가는 그 누구보다도 오다가의 성장을 집요하게
방해했죠.
하지만 그러한 해묵은 원한도 아사쿠라씨가 멸망하면서 소멸하고 맙니다.
요시카게를 바친 아사쿠라 가게아끼는 노부나가로부터 이전의 영지를
계속 보유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지만 후에 가가 잇꼬잇끼의 공격을
받아 죽고맙니다. 배신자다운 처참한 최후였죠.
이렇게 아사쿠라가를 멸망시킨 노부나가는 남은 숙적 아사이가에
맹공을 가하고, 결국 오다니성은 떨어지고 맙니다.
아사이.아사쿠라라는 반노부나가 세력의 강력한 지주가 사라지자
각지의 반노부나가세력들은 그 힘을 크게 상실하고 맙니다.
남오오미에서 노부나가에게 끈질기게 저항했던 롯까꾸 쇼테이 부자도
마지막 거점을 사실한채 방랑의 길에 오르게 되고, 오오미 각지의
정토진종 사찰들과 인근신도들은 노부나가의 잔인한 손길을 피할 수
없게되죠.
눈에 가시를 뽑아버린 노부나가는 이번엔 남쪽으로 눈을 돌려
미요시 요시쓰구를 공격하여 멸망시킵니다. 이로써 미요시씨도
역사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죠.
요시쓰구의 멸망에 충격을 받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다시 노부나가에게
항복해 버립니다.
이로써 기나이에서 노부나가에게 대항하던 세력은 이시야마 혼간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격퇴되고 맙니다.
노부나가에게 대항했던 가문들(아사이, 아사쿠라, 롯카쿠, 사사끼, 미요시
마쓰나가)은 모두 멸망단하거나 항복하고 맙니다.
전 사실상 이 대목에서 노부나가의 천하제패는 기정사실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다께다, 우에스끼, 모리 그리고 혼간지등의 강적들이 남아있었지만
기나이의 엄청난 상권과 기술력을 독차지한 노부나가의 상대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사이.아사쿠라의 멸망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것은 아마도 겐뇨였을겁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제는 잇꼬잇끼의 거점을 지켜주던 반노부나가측
영주들이 모두 몰락하고 말았으니까요.
이제 기나이에서 노부나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혼간지밖에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겐뇨는 요시아끼를 끌어안은채 또다른 계략을 준비합니다.
다음번엔 계속되는 혼간지와 노부나가의 싸움을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노부나가 VS 겐뇨 고사 #21
작년초에 나온 로긴지의 전국인물열전에 겐뇨고사가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선 많은 사가들이 그들 노부나가의 최대의 라이벌로 꼽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언뜻보면 겐뇨는 노부나가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인물로
보이기도 합니다. 노부나가가 야심만만한 전형적인 적국시대의 영주인데
반해서 겐뇨고사는 정토진종이라는 불교교단의 지도자 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두사람은 일본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기나이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됩니다.
사실 겐뇨의 입장에서는 노부나가가 정말 뜻밖의 적이라고 할 수 있었죠.
노부나가 이전에도 많은 영주들이 정토진종을 공격했지만, 그 강도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죠. 또 대부분의 경우 상대가 상대인만큼 적당히
싸우다가 서로 타협하는 선에서 물러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중앙집권을 꿈꾸는 노부나가는 자신 이외의 다른 세력이
백성을 지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면에서 이 두사람을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일단 영지면에서 본다면 단연 노부나가가 앞서 있었죠.
노부나가는 오와리,미노,이세,오오미,이가등의 영지에 기나이 5국을
포함하여 거의 10여개국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에 반해
정토진종은 법국 가가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눈에띄는 영지는
없었습니다. 다만 곳곳의 사찰과 거기에 속해있는 사령이 상당히
많이 있었죠.
다음으로 병력을 본다면 노부나가는 10여개구에서 총 10만에 달하는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겐뇨측은 훈련된 상비병은 그다지 많이 않았지만 그ㄸ그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신도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죠.
또한 노부나가의 중앙집권적 체제구축에 반발하는 지방 호족들도
잇꼬잇끼와 뜻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병력을 단순히 숫자로만 본다면 양측은 거의 막상막하의
상황이었죠. 하지만 잇꼬잇끼는 훈련이 되지않았고 군비도 워낙
미비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전술이 필요한 야전에서는 도저희
경험많은 오다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잇끼군은 항상
거점수비를 기본적인 전술로하면서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의 싸움을
해나갔죠.
잇꼬잇끼는 이러한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기존
영주들과 손을 잡습니다.
그들과 같이 전술을 폄으로써 잇끼군은 야전과 거점수비모두에 상당한
강점을 가지게 되죠. 하지만 아사이.아사쿠라가 몰락한 뒤로는 그러한
연합전선은 사실상 무너지게 되고, 이젠 잇끼와 노부나가가 정면대결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토진종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죠.
다음으로 노부나가와 겐뇨의 개인적인 능력을 비교한다면......
글쎄요.. 게임에선 수치적으로 나와있기 ㄸ문에 비교가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비교할 수 없겠죠.
먼저 노부나가를 본다면 뭐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면에서 유능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문제는 겐뇨가 이러한 노부나가의 능력을 얼마나 따라가느냐 하는 것인데..
일단 통솔력면에서는 겐뇨도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지역에 분포해있는 잇끼군을 효과적으로 운용했으니까요.
그리고 대세관 역시 상당히 밝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겐뇨가 노부나가의 헛된 약속(오사까를 넘기면 그이상의 대가를 주겠다는)
믿고 물러났다면 아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교력역시 탁월했죠.
이전에 적이었던 영주들과도 연대한는 능력을 발휘했으니까......
단 한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과연 겐뇨가 직접 전장에 나간적이
있었느냐 하는 것인데.....
제가 아는 바로는 겐뇨는 노부나가와 싸우기 시작한때부터 항복할 때까지
한번도 이시야마 혼간지를 나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말해 항상 안방에 앉아 전국을 지휘했다는 거죠.
과연 이러한 지휘가 가능한 것이었을지....
물론 이런 생각은 해볼 수 있습니다. 겐뇨가 젊었을때는, 그러니까
아직 종정이 되기전, 혹시 전장에 나가 봤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토진종의 종정자리가 세습된다는 것을 감암할때 후계자인
겐뇨가 위험한 전장에 직접 나갔을 일을 없었을것 같습니다.
좌우지간 전 이점을 가장 의문스럽게 생각합니다.
겐뇨가 직접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면 야전사령관은 과연 누구였는지....
책에는 시모쓰마 요리아끼과 이시야마 방어전을 총지휘 했다고 하는데...
그럼 그 외의 곳에서 벌어진 싸움은 누가 지휘했는지....
지휘관이 그렇게 여러명 이었다면 과연 체계적인 통솔이 가능 했을지...
하지만 이러한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잇꼬잇끼는 비정규군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체계적인 모양새를 같추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역시 군사조직도 종교조직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보신분은 알겠지만, 교회내에도 상당히 많은 직분이 있고
또한 그러한 직분은 가장 말단인 소구역에 이르기까지 거미줄처럼 연결되
있습니다.
또한 각 구역엔 구역장이, 구역이 몇개 모이면 좀더 큰 구역이....
뭐 이런식으로 피라밋 조직이 이루어 지죠. 또한 각 조직의 장들은
조직원(좀 이상하게 들리나?)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게되죠.
저도 잇꼬잇끼또한 이러한 체계적인 종교조직을 바탕으로 노부나가와
싸움을 해올 수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하루이틀만에 수만명을 동원한다는 것은 강력한 조직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겐뇨는 이러한 각지역의 조직의 장을 그 지역의 사람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산에서 부리고 있는 심복을 파견 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산재해 있는 조직을 자기뜻대로 통솔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거 싱거운 얘기가 꽤 길어진것 같군요.
제가 오타가 좀 많죠.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나가시마 간쇼사의 몰락 #22
아사쿠라.아사이와 기나이의 반 노부나가 영주들이 차례로 쓰러지자
무로마치 말기부터 기세를 올렸던 잇꼬잇끼도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전에 볼 수 없었던 노부나가라는 강력한 영주의
등장 때문이었죠. 노부나가의 파괴력은 이전에 혼간지와 격전을 벌였던
아사쿠라나 롯까꾸, 호소까와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특히 혼간지를 반드시 괴멸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대단히 강했습니다.
아사쿠라의 멸망으로 가장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에찌젠내의 정토진종
신자들이었습니다. 에찌젠은 본시 인근 법국 가가의 영향으로 정토진종이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에찌젠의
수호 아사쿠라씨와 마찰이 생기면서 포교자체가 상당히 아려워졌었죠.
하지만 노부나가 등장이후 아사쿠라씨가 혼간지와 동맹을 맺으면서
자연 에찌젠의 신도들도 크게 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사쿠라가 힘었이 망하게 되자 그간 걱정없이 포교를 하던
정토진종은 삽시간에 노부나가의 부하들에 의해 도륙을 당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에찌젠의 잇꼬 지도자들은
인근 가가의 막강한 문도들의 힘을 빌려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에찌젠 잇꼬잇끼는 먼저 노부나가가 남겨놓은 행정관들을 차례로 살해하고
요시카게를 배신하고 삶을 도모한 아사쿠라 아게아끼와 가게카게의 성을
포위합니다. 가게아끼는 급히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하지만 노부나가는
가게아끼를 그냥 내버려 두죠. 노부나가역시 가게아끼같은 배신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막강한 잇끼세에 의해 가게아끼는 죽고, 가게타게는 겁에 질려
문도들에게 항복합니다.
상황에 이렇게 까지 되자 잇끼세는 점차 불어나게 되었고, 거기에 곳곳에
숨어있던 과거 요시카게의 부하들이 합세하여 그 수가 거의 4만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에찌젠의 소 영주들은 이러한 잇끼세에 당하지 못하고
모두 패퇴하죠. 다시말해 에찌젠도 가가와 같은 농민지배의 나라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영주들이 농민들에게 오히려 죽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잇끼세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비록 겉으로 볼때는 이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병력도 엄청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은 근본적으로 농민이었지 무사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근거는 에찌젠이란 땅에 있었고, 그 땅을 되찾은 이상 더이상의
군사적 행동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만약 과거 요시카게에게 이같이 용맹한 군대가 있었다면 아마 노부나가는
요시카게를 무찌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에찌젠잇꼬잇끼는
노부나가에게 별다른 위협을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려고 할 뿐, 남의 땅을 뺏으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들은 자신을 지킬때만 힘을 발휘하지
외부로 공격해 나오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요시까게가 건재했을때는 이들(잇꼬종도)의 노부나가에대한
적개심을 교묘히 이용하여, 노부나가 공격의 전위부대로써 유용히
써먹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체계적으로 지휘해줄 무사도, 요시카게같은
반노부나가적인 영주도 없었기 졸ⁿ 그들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세력인
노부나가를 공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노부나가도 이러한 에찌젠의 잇꼬잇끼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노부나가가 심각하게 생가하고 있던것은 오히려 이세 나가시마쪽이었다.
노부나가는 이미 나가시마 간쇼사의 공격에서 두차례나 고배를 마신바가
있었으며, 신장포위망형성시에는 나가시마잇끼들의 오와리공격으로 동생을
잃기도 하였다. 더구나 나가시마간쇼사는 지리적으로도 노부나가 영지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잇었기 때문에 도저희 용납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노부나가는 약 6만에 달하는병력을 이끌고 나가시마잇끼에대한
세번째 공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번의 공격은 이전의 공격과는 규모자체가 달랐고, 그에따라
공격방법도 달랐다. 엄청난 대군을 수.륙양면으로 동원한 노부나가는
나가시마주변의 민가와 논밭을 작살내며, 주변의 농민들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히 학살했다. 잇꼬종도를 뿌리패 뽑아버리겠다는 작전이었다.
기나이의 적들을 모조리 소탕한 노부나가는 전과는 달리 느긋하게 공격을
할 수 있었고, 나가시마 주변의 보루들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마침내
간쇼사를 완벽하게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포위한것은 육지만이 아니었다. 해적출신인 구끼 요시타카가 이끄는 선단은
강하구를 막아 간쇼사로의 물자공급을 끈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나가시마 잇끼사령관인 시모쓰마 요리아끼였다.
요리아끼는 당시 간쇼사의 주지었던 혼간지 사교를 보좌하며 잇끼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나가시마의 잇끼들은 노부나가의 공격이 예전과같이 일시적인 것이리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간 것이었다. 예전엔 노부나가의 배후를
위협하는세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노부나가를 위협할 만한 세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위상태가 계속되자 마침내 간쇼사의 식량은 바닥나게 되었고,
오다군은 직접공격을 피한채 밤낮으로 간쇼사에 대포를 쏘아댔다.
식량이 떨어진진 2달만에 마침내 시모쓰마 요리아끼는 목숨만 살려달라는
조건을 내걸고 항복한다.
그러나 이 역시 노부나가의 책략에 불과했다. 정면공격을 하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이처럼 기다리며
감이 익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 것이었다. 노부나가는 이미 잇끼들을
몰살시키겠다고 부하들에게 공언한 바가 있었으며 그것을 실천해 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간쇼사의 문이 열리고 굼주림으로 반죽음이 된 잇끼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비무장상태의 잇끼들을 기다리고 있던것은
오다군의 집중사격이었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잇끼들은 채 강가에 닫기도전에 대부분이 오다군이
쏘아대는 철포에 쓰러졌고, 뒤에서 이를 보던 잇끼들은 노부나가의 배신에
치를떨며 칼하나만을 손에든채 오다군의 본진을 향해 미친듯이 돌진해갔다.
잇끼들이 노부나가의 공격을 예상치 못했듯이 오다군도 두달이나 굶은
잇끼들이 이처럼 미친듯이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본시 같은 교를 믿는 신자들의 유대감이란 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형제들이 무참히 죽어가는 것을 보고는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것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초월한 용맹이었다.
이러한 잇끼들의 돌진에 오다군 본진의 무사들도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살아남은 잇끼들은 오다군을 해집으며 빠져나갔다.
노부나가는 다시한번 잇끼의 무서움을 실감했을 것이다.
아무튼 노부나가는 이로써 나가시마 잇끼 2만을 격멸할 수 있었고,
나가시마 인근 사찰의 2만에 달하는 잇꼬종도들도 항복을 받지 않은채
모조리 죽이고 말았다.
이로써 노부나가를 오랬동안 괴롭해 왔던 나가시마 잇꼬잇끼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혼간지를 떠받치는 세력중의 하나가 무너진
것이었다.
나가시마 간쇼사를 무너뜨린 노부나가는 곧 다음 작전에 돌입한다.
그것은 바로 이시야마 혼간지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제 더이상 혼간지를 도울 만한 영주는 기나이에 찾아 볼 수가 없었으며,
이시야마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황에 있었다.
무로마치 말기부터 근 100여년간 위세를 떨치던 잇꼬잇끼 최대의
위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과거 어떠한 영주도 해내지 못한것을 노부나가는
과감히 해내고 있었다.
전국시대 대부분의 영주들이 불교신자였더것을 감안한다면 노부나가의
이와같은 정토진종에 대한 공격이 얼마나 파격적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본시 당시 일본에선 중은 영주들도 함부로 죽이지 못할만큼 고귀한 존재였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그러한 터부들을 전혀 상관치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택동은 생전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했다.
노부나가가 믿는 것도 모택동과 다를바 없었다. 그는 오로지 힘만을 믿었고,
힘만있으면 무었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이러한 노부낙의 생각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는 4만에 달하는 잇꼬종도를 죽임으로써 이세를 완전히 평정했다.
하지만 그로써 노부나가는 더 많은 농민들을 적으로 돌렸던 것이다.
그는 이미 타협의 길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이러한 노부나가의 성격은 그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목 : [幸村/기타]Ξ 나가시노 전투 上 #23
나가시노 합전은 워낙 유명한 전투라 처음엔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본 책에 이 싸움에 대한 흥미있는 내용이 있어 그것을 중심으로 다시한번 나가
시노합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신겐이 상경중 허무하게 죽자 다께다군은 신겐의 죽음을 비밀로 한채 가히로 퇴각합니다.
신겐은 죽기전 자신의 죽음을 3년간 비밀로 할 것과, 가독은 가쓰요리의 아들 노부까스로
하여금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노부까쓰가 16세가 될때까지는 가쓰요리가 대
신 통치)
그러나 다께다군이 비밀로 하려던 신겐의 죽음은 채 한달이 되기도 전에 알려지고,
이에야쓰는 곧바로 반격작전을 개시 잃었던 영지를 상당부분 되찼습니다.
신겐의 죽음이 다께다가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습니다.
사상 최고의 지도자를 잃은 다께다가는 후계자가 정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당기간
상속문제를 둘러싸고 내분을 벌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대두되는 문제가 실제 계승자인 가쓰요리의 혈통에 관한 것인데.....
사실 가쓰요리는 당시 여러가지 문제로 가신들의 인망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쓰요리가 본시 고슈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신겐은 일찌기 시나노의 호족 스와 요리시게씨를 무너뜨리고 그의 딸을 자신의
측실로 삼은 바가 있었습니다. 가쓰요리는 바로 그 측실로부터 나온 자식이었죠.
또한 가쓰요리의 요리라는 이름또한 죽음 스와 요리시게의 요리 자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가쓰요리라는 이름은 멸망한 스와씨를 부흥시키라는
뜻이었다는 것이었죠. 때문에 가쓰요리의 본래 성또한 다께다가 아닌 스와씨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신겐의 장남 요시노부가 모반을 꾀하다 죽게되어 가쓰요리가
상속자로서 결정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쓰요리는 계승자가 되기까지 상당히 사연이 많았던 인물이었죠.
전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습니다.
설사 신겐이 죽었다해도 다께다가에는 이미 상당히 성장해있는 후계자 가쓰요리가
있고, 또 훌륭한 가신들이 많이 있는데 굳이 그렇게 빨리 퇴각할 이유가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당시 거의 멸망직전에 있던 이에야쓰만이라도 제압
해 놓았다면, 후에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죠.
솔직히 신겐이 죽었다고 해도 다꼐다의 정예병은 그대로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고 합니다.
가쓰요리는 위에서 말한것 처럼 가신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음은 물론
이련이와 다께다 일족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다께다 일족의 최고 원로는 아나야마 노부끼미(穴山信君)였는데
그는 본래 다께다씨로써 가쓰요리와는 의형제 사이였다고합니다.
아나야마 노부끼미는 평소 7년 연하인 가쓰요리를 우습게 봤다고 하더군요.
다시말해 명목상의 상속자는 가쓰요리였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족의 수장격이었던 아나야마 노부끼미는 드러내 놓고, 가쓰요리를
하대 했으며 이러한 다께다 일족과 신겐의 가신들(일족이 아닌 가신들...
바바, 고사까, 야가가따 등등) 사이에는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신겐이 키운 신하들은 그의 유언대로 가쓰요리와 그의 어린아들
노부까쓰를 지지했고, 다른 다께다 일족들은 그걸 탐탁치 않게 봤다는
것이죠. 사실은 신겐의 아버지 노부토라도 다께다가의 정식 상속자가 아니었고,
신겐또한 정식으로 가독을 상속했다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요....
좌우지간 이러한 집안싸움으로 인해 다께다가는 내분에 휩싸이게 되고.
가쓰요리는 약 1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다꼐다가의 수장이 됩니다.
이 일년간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아사이를 물리치고, 이에야쓰는 빼았겼던
도오도오미의 영지와 나가시노성을 되찾죠.
어찌보면 전국시대의 패자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다께다가는
하릴없는 집안싸움으로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죠.
다음번에는 나가시노전투의 진행상황과 다께다군의 결정적 패인을 살펴
보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나가시노 전투 下 #24
나가시노 전투의 발단은 오쿠다이라씨라는 호족에서부터 시작된다.
오쿠다이라씨는 본래 이마가와가 수하의 세력이었다. 그러던 것이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죽고, 무능한 그의 아들 우지자네가 이에야쓰에게 영지를
대부분 빼았기면서, 이마가와가에서 도쿠가와가쪽으로 넘어가고 만나.
그러나 오쿠다이라씨의 변절은 그 뒤에도 계속된다.
다께다 신겐이 미까와 동부를 공격하면서 도쿠가와의 성들을 차례로
떨어뜨리자 오쿠다이라씨는 다시 다께다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러던것이 신겐의 급사를 기점으로 인해 다시 도쿠가와 쪽으로 넘어가게
된것이다. 그야말로 변절을 밥먹듯이 하는 호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살벌한 전국시대에서 소호족이 자신의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그야말로 처절한 몸부림 이었던 것이다.
오쿠다이라씨는 변절할때마다 전의 주가에 보냈던 인질들이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인질들은 배신했을 경우 항문으로부터
입까지 창을 찔러 넣는 꼿이꾀기란 무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꼿이꾀기의 특징은 괴임을 당한 인질이 의외로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하튼 당시 오쿠다이라씨는 도쿠가와 영지내의 다께다측 거점인 나가시노성의
수비를 맡고 있었고 이에야쓰의 그러한 오쿠다이라씨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여(상당한 영지) 그들은 도쿠가와가쪽으로 끌어들인다.
이것은 다께다가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질들을 즉각 처단한 가쓰요리는 약 25000의 병력을 이끌로 나가시노성을
공격해 간다. (25000이란 병력의 수효는 책에따라 차이가 난다.)
이에야쓰로써는 다시한번 다께다씨와 정면대결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것이다.
하지만 신겐이 죽었다고 해도 다께다씨는 아직 이에야쓰에겐 버거운 상대였다.
또한 이에야쓰는 이미 전년에 다께군의 강공에 난공불락이라던
다까덴진성을 빼앗긴바 있었다.
때문에 이에야쓰는 다시금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이에야쓰가 혼자힘으로 다께다씨를 막을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노부나가는 장남 노부타다와 함께 약 3만~3만5천 의 병사를 이끌고
출진한다.
미카타가하라때와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그 당시 불과 3천의 원군밖에 보내지 못했던 노부나가가 이번엔 직접
3만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한 것이었다.
그만큼 노부나가는 자신이 있었고, 기나이에는 더이상 자신을 괴롭힐만한
세력이 없다는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불과 2년만의 일이었다.
신겐의 사후 약 2년간 노부나가는 천하제패의 기반을 완전히 닦아 놓았던
것이었다. 그는 이제 다께다,우에스끼,모리,호조같은 지방세력들만
격파하면 되었던 것이다.
나가시노 전투의 막은 이렇게 오르게 되었다.
나가시노성은 함락되지 않고,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시시각각 전열을
상황에서 가쓰요리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과연 여기까지 와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오다군과 한판 붙을 것인가.
가쓰요리는 결국 후자쪽을 선택하게 된다.
노부나가는 시다라케하라에 진을 치고 3천의 철포대를 대부대로 나눠
배치한다. 당시까지도 노부나가는 철포가 과연 다께다의 막강한 기마대를
무찌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상당히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한다.
사실 철포가 이렇게 대규모로, 또 정면으로 사용되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일본역사에대한 강의를 듣을 때 교수님이 나가시노전투에 대한
예기를 하시면서, 이 전투를 계기로 보병이 기병을 앞도하게 되었다라고
설명하셨다. 강의 후 나는 교수님을 찾아가 철포는 서쪽에서 먼저 사용되었고,
노부나가 또한 처음 입경했을 때 철포때문에 상당한 시달림을 받았는데
왜 하필 나가시노 합전을 철포의 본격적 사용의 기점으로 보시는 겁니까
하고 질문 한적이 있었다. 사실 철포는 나기시노합전 이전부터 사이카나
네고로등 용병집단의 주요한 무기로 사용되고 있었기 졸₂潔駭.
교수님의 답변은 이러했다.
"서쪽의 선진지역에서 총이 먼저 사용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신무기를 주요한 전투의 주력으로 배치한 것은 노부나가가
처음이 아니었는가? 오다군의 수효가 많았다지만 전투의 결과란것은
예측할 수 없는것이 아니겠는가? "
교수님의 답변은 대략 이러했다.
다시말해 노부나가는 중요한 전투의 승패를 철포라는 신무기에 건 최초의
무장이고, 나가시노 전투는 그 최초의 전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노부나가의 작전에 하나의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당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수효는 거의 4만5천에 달했고, 여기저기 수비군
을 남겨놓은 다께다군은 만5천정도에 불과했다. 무려 3배의 병력차가
나는 것이다.
또한 노부나가는 그러한 많은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다께다의 기마병에
대비하기 위해 철포대 앞에 삼중의 방책을 치고, 겹겹으로 도랑을 파
기마병의 진입을 견제했다. 이러한 포진은 먼저 쳐들어가 적을 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쳐들어 오는 적을 받아 치겠다는 포진이었다.
하지만 만약 적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 우리가 가쓰요리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적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군대로 엄청난 진지를 치고 있는 적에게 돌격해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건 분명 미쓰테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최근에 본 책에선 이 미스테리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었다.
나가시노 전투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이렇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가쓰요리는 가신들의 반대에 무릅쓰고, 공격을 감행하고
결과적으로 다께다가의 정예병과 뛰어난 가신들은 대부분 철포의 밥이 된다.
대강 이런것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어디까지나 승자측(오다)의 진술일 뿐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싸움이 시작되기전 노부나가는 다꼐다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책략을 사용한다.
사쿠마 노부모리로 하여금 다께다측에 거짓내통하게 한 것이었다.
사쿠마는 다꼐다측에 밀서를 보내 자신은 미카타가하라의 패전이후부터
노부나가와 계속 불화하여 이번기회에 그를 배신하려 한다는 뜻을 전달한다.
그는 또한 다께다측이 정면에서 공격해오면 자신은 좌측으로부터 호응하여
오다군을 교란 할 것이며, 이렇게만 하면 노부나가와, 이에야쓰의 목을
얻는것은 쉬운 일일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 거짓내통도 사실 상당한 무리가 있는 작전이었다. 사쿠마가
노부나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물론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대로
오다가의 가신이었고 그의 가족들 또한 모두 노부나가의 수중에 있었다.
또한 나가시노 전투의 상황자체가 오다군에 앞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배신자는 주로 불리한 측에서 나오지 유리한 측에서 나오는
법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께다군은 노부나가의 이러한 속보이는 술책에
완저히 말려든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에 이설이 있었다.
최근에 읽은 역사인물관이란 책에선 상당히 다른 그러나 신빙성 있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쓰요리가 가신들의 반대를 부릅쓰고 공격을 감행하여 대패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승자인 오다측의 기술일 뿐이지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다꼐다가의 실권을 쥐지 못했던 가쓰요리가 무슨 수로
대다수의 가신들이 반대하는 상황속에서 돌격 명령을 내릴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전년에 있었던 다까덴진 공략전이나 최근의 나가시노 탈환
전도 실제로는 친족세력의 우두머리인 아나야마 노부끼미의 지휘하에
이루워 졌던 것이었다.
다시말해 가신단이 반대한 공격에 대해 아나야마측이 주전을 고집했고
실권이 없었던 가쓰요리는 친족세력의 주전론에 말려 싸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사실과 다른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린 다께다가의 맹장들이 대부분 무리한 공격도중 철포대에 희생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 철포에 맞아 죽은 장수는 쓰치야 마사쓰구 한명뿐이라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다른 무장들은 이미 패전이 기정사실화 된 상황에서
후퇴도중 죽었다는 것이었다. 또하나 놀라운 것은 친족세력을 이끌고 있던
아나야마 노부끼미는 노부나가의 계략에 말려들었다는 걸 안 순간 예비대를
이끌며 끝까지 전선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결국 전선에서 이탈하고 만다.
이러한 아나야마 노부끼미의 행동과 판단미스가 패전의 최대 원인이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다께다가의 중신 고사까 마사노부(高坂昌信)는
패전의 책임이 아나야마에게 있다고 가쓰요리에게 간하며 그를 할복시키라고
진언했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주장도 완전히 납득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아무리 친족세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가쓰요리가 적의 책략을 간파 했다면
그런 상황에선 어찌되었든 후퇴하는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당시 바바 노부후사는 미까와의 농경지만 작살내도 소귀의 성과는
거둔것이라며 후퇴를 간했다고 한다.
전국시대의 명문 다께다씨를 일순간에 멸망으로 몰아넣은 나가시노전투
과연 이 전투의 진상이 어떠한 것이었느냐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제목 : [幸村/기타]Ξ 아즈찌 축성 #25
오랜 숙적이요 걸림돌이었던 다께다씨를 보기좋게 격파한 노부나가는
본격적인 주코꾸 공략에 들어갑니다.
그 일차사업으로서 과거 롯까꾸씨의 거성이었던 간논지성이 있던 자리를
크게 확장하여 새로운 도성인 아즈찌성을 쌓습니다.
아쯔찌성은 당시 일본의 성중 최대규모로 건설되었고, 동원된 인부만도
수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노부나가의 권세를 한껏 뽐낸 공사였죠. 이 아즈치축성에대한
약간 색다른 의견이 있는데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지와 모토히꼬인가 라는 사람인 쓴 역설의 일본사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거기 아즈치 축성에대한 재미있는 생각이 있더군요.
요는 이렇습니다.
"아즈치축성은 단순히 성대한 도성을 쌓는다는 의미 이외 다른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의미는 바로 아즈치(安土)라는 이름에 기인하는데
그것은 중국의 헤이안낙토(平安樂土)라는 말이에 온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수도인 교토역시 본 이름은 헤이안쿄(平安京)로써 거의
비슷한 어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노부나가가 자신의 거성의 이름을
아즈찌라 지은것은 바로 자신의 거성이 교토에 버금가며 자신은 천황에
버금하는 인물이란 것을 은연중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노부나가는 인근의 사찰과 신사에서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제를
여러차례 올리게 했답니다. 살아있는 신이 되려고 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아즈치성을 축성하게 됨으로써 노부나가는 더욱더 일본의
실권자로 부상하게 되었고, 이제 더이상 그에게 도전할만한 세력은 없어
보였습니다.
이제 다급해진 것은 바로 이시야마 혼간지였습니다.
노부나가는 이미 다께다 정벌 이전에 오사까 일대의 혼간지 세력에
강력한 공세를 편 일이 있었고, 그로인해 오사까등 기나이 일대에 널리
퍼져있던 혼간지의 세력권은 본산과 그 일대의 소규모 지역으로 대폭 축소되어
있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아께치 미쓰히데를 주장으로 하여 기나이의 영주들로 하여금
이시야마 혼간지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제 노부나가의 명령 한마디면 이시야마 혼간지는 오다의 막강한 정예군에게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혼간지의 법주 겐뇨 고사는 이러한 위기를 타게하기 떠돌이 장군 요시아끼를
끌어 들입니다. 당시 노부나가에의해 축출되었던 장군 요시아끼는 기나이의
사찰에서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를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죠.
하지만 아직 요시아끼는 야심을 버리지 못했으며, 설혹 야심을 버렸다
하더라도 노부나가에 대한 원한만큼은 결코 버릴 수 없었습니다.
겐뇨는 요시아끼를 부추겨 모리씨에게 구주의 오또모씨와 화해하고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노부나가를 치라고하는 내서를 보내게 합니다.
그러나 모리씨만으로 도저히 막강한 오다군을 상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또하나의 강대한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계책을 세우는데 그건 바로
에치꼬의 우에스끼 겐신에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겐신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리 주요한 대명으로는 생각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숙적 신겐이 죽고나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그의 실력이 드러나게 되죠.
그러나 우에스끼씨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혼간지로써는 상당히 어려운 감이
있었습니다.
잇꼬종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엣쮸,에찌꼬등지에서 우에스끼세와 싸워왔고,
겐신의 아버지인 나가오 다메가게또한 엣쮸의 농민반란군을 치러 나갔다
죽은 바 있었습니다.
혼간지와 우에스끼의 싸움은 그 후로도 계속 되었습니다.
신겐이 우에스끼때문에 상경이 어렵다고 하자, 겐뇨는 상경만 한다면
자신이 에찌꼬등지의 문도들을 총 궐기시켜 겐신의 시나노 침공을 막겠다고
한 적이 있었고, 실제로 겐신은 있꼬잇끼로 인해 수년간 엄청난 피해를
본 바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까지 우에스끼는 오다가와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물론 공통의 적이었던 다께다를견제하기 위한 동맹이었죠.)
이러한 연유로 해서 혼간지는 직접 우에스끼와 외교를 하기가 어려웠고,
요시아끼로 하여금 우에스끼와의 사이에 가교를 놓아주도록 부탁합니다.
요시아끼는 그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고루하고 또 막부에대한 충심이
남아있었던 겐신에게 오다와 손을 끊고 다께다와 동맹을 맺으라고 권유합니다.
물론 노부나가도 가만있지는 않았죠. 노부나가는 그 누구보다도 겐신의
위력을 알 고 있었기 때문에 겐신에 대해서만은 정말 지극정성으로
저자세의 외교를 합니다.
하지만 전국시대의 돌연변이 겐신은 강력한 오다와 손잡는걸 거부하고 오히려
舊適이었던 다께다씨와 동맹을 맺습니다. 사실 그 당시 겐신이 다께다를
쳤다면 다께다는 아주 쉽게 멸망했을 겁니다. 하지만 겐신은 신겐이 죽은이상
가쓰요리는 적수가 아니라고 보고 오히려 다께다씨와 화친합니다.
정말 별난 사람이었죠.
아무튼 겐뇨와 요시아끼의 이러한 적극적인 외교로 인해 반 노부나가 진영은
다시금 활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있었죠. 모리씨와 우에스끼는 비록 그 세력은 대단하다
할지라도 본거지가 교토와는 너무 멀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지금당장 위기에빠진 혼간지를 돕기위해 원군을 파견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겐뇨는 혼자 힘만으로 기나이의 오다세와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겐뇨는 각지의 사찰에 서신을 보내 본산수호의 마지막
의지를 불태우며 본산주변에 방책을 쌓고 도랑을 파며 다가올 오다군의
총공세에 대비합니다. 사이카패등 용병집단들도 속속 본산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죠. 또한 강을 이용하여 막대한 물자를 혼가지로 반입하여 장기농성의
준비를 합니다. 혼간지는 이미 절이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요새였습니다.
이리하여 오사카 지역에는 다시금 전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이시야마 본산 공격 #26
산재해 있던 적들을 대부분 소탕한 노부나가는 드디어 기나이에 남아있는
마지막 적인 이시야마 혼간지를 공격하게 위해 출진합니다.
이 출진에선 시바다 가쓰이에 마에다 도시이에등 에찌젠에 파견된 무장들을
뺀 오다군의 나머지 장수 거의 대부분이 참가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기나이의 정세에 익숙한
아라끼 무라시게(荒木村重), 호소까와 우지타까(細川藤孝), 마쓰나가 히사히데
등이었습니다.
셋쓰의 이시야마 본산은 일곱 줄기의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또한 그 인근
지역이 거의 늡지에 가까운 곳이 많았기 때문에 공격하기도 매우 어려웠고,
봉쇄하기도 어려운 지형이었습니다.
때문에 일차적인 포위가 완성된 상황에서도 혼간지의 신도들은 강줄기를 따라
계속해서 본산으로 모여들고 있었으며, 식량과 탄약등 다가올 전투에
대비한 물자를 속속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중신 하라나 나오마사(原田直政)
에게 일만 수천의 병력을 주어 혼간지로 통하는 적의 보급선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다군의 움직임은 인근의 문도들에 의해
금방 간파 되었고, 사이까패의 수장 마고이치는 휘하의 정예 철포대와
문도병을 동원하여 오다군의 행군 루트에 매복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멋모르고 행군하던 오다군에게 먼저 가해진 것은 사이카패의 집중적인
사격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적의 대장기가 있는 본진에는 집중적인
사격이 가해 졌죠. 집중사격으로 본진이 혼란에 빠지자 곧이어 백병전에
능한 문도병들이 장창으로 일종의 밀집대형을 이루면서 돌격해 들어갔고,
하라다 나오마사가 이끌던 오다군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주장이었던 나오마사도 결국 집중사격을 받고 죽죠.
하라다군을 격파함으로써 기세가 오른 문도병과 사이까패는 여세를 몰아
오다군 본진을 향해 밀려 들어갔고, 노부나가는 적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겨우 인근의 사찰로 피해 들어갑니다.
노부나가는 그 과정에서 사이까패의 집중사격을 받아 총상까지 입습니다.
다행히 시간이 흐름에따라 히데요시, 미쓰히데등이 군사를 몰고와 어느정도
위기는 넘길 수가 있었죠.
하지만 노부나가는 그러한 참담한 패배를 그대로 감수하는 스타일의 무장은
아니었습니다. 노부나가는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죠.
노부나가는 후속부대가 도착하자마자 부상을 입은 몸으로 혼간지측을 공격했고,
승리에 들떠있던 문도병들은 노부나가가 선진에 서서 사기가 오른 오다의
정예군에 크게 패하고 말죠.
노부나가는 이 승리로 인해 어느정도 자존심을 회복합니다.
사실 이 싸움은 제가 볼 때는 노부나가의 실수 였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이시야마본산에 대한 공격을 너무 서두른 면이 있었죠. 또한 병력이
채 모이기도 전에 공격을 감행한 것부터가 좀 이상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다군이 어느정도 선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총대장인
노부나가가 선진에 서서 용전분투 했다는 것인데.... 이것또한
병사들의 사기를 올 릴 수는 있을 지는 몰라도 십오개국 십만이상의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취할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다 덧붙여 혼간지측의 실패 요인을 들자면, 일단 지휘체계가
너무나도 알 수 없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전국시대에서 군대의 총사령관은 물론 영주입니다. 영주는 행정,사법,군사의
거의 모든 업무를 처결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시야마 혼간지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혼간지의 종정이며 최고 실력자인 겐뇨는 혼간지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으며 실제로 갑옷을 걸치고 싸운적도, 일선에서
지휘를 한적도 없었습니다. 그럼 그 많은 문도군은 누가 지휘를 했느냐?
이것이 바로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이시야마 본산의 수비를 총괄한 것은 겐뇨가 아니라
시모쓰마 요리까네였습니다. 제 생각에 겐뇨는 거의 신적인 숭상을 받았기 졸ⁿ
일선에 나가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야전사령관은 누구였는가?
물론 시모쓰마 요리까네나 그 밖의 시모쓰마 일족들이 야전사령관도
겸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들이 사이카패를 지휘할 수는 없었을것
아닙니까?
사이카패는 엄연한 독립부대였고, 그 지휘는 스즈끼 마고이치, 사부로다유등이
맡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엄격히 말해 혼간지 문도병들은
이원적인 지휘를 받고 있었다는 건데 제 판단으론 이러한 계통이 서지못한
지휘체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도대체 누가 주장이고 누가 부장인지?
위기 상황에선 누구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거죠
이러한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문도병들은 공격할때는 신나게 공격하지만,
후퇴할때나 추격을 당할때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사리 무너지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겐뇨나 또는 그의 아들인 교뇨가 직접 갑옷을 입고 지휘를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무튼 이리하여 이시야마 본산에대한 공격의 제 일라운드는 초반엔
혼간지측 우세 후반엔 오다측 우세라는 형태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노부나가는 이 상황에서 더이상의 공격을 보류한채
혼간지의 보급선만을 최대한 차단하는 지구전적인 전법으로 공격방법을
바꿉니다. 제 생각엔 이전의 악전고투가 그로 하여금 직접공격은 어렵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다군의 봉쇄도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육지쪽은 보급선은 대부분 차단되었지만, 세토내해의 여러
해 혼간지측 영주들이 끊임없이 물자를 공급하고 있었기 졸₂都求.
노부나가는 이러한 적의 해상보급을 막기위해 대규모 선단을 파견하지만
수전에 능한 모리군의 해적출신 장군들에게 철저히 농락당하고 격파되어
오다측 수군은 사실상 전멸을 당하고 맙니다.
이로써 노부나가에게는 수군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또하나의 과제가
떠오르게 되었고, 이제 혼간지와 노부나가의 싸움은 수전이라는 형태의
제 이라운드로 접어들게 됩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기이 사이카패 공격 #27
기이라는 지방은 사실 그리 특별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 최남단에 위치한 사이카촌의 주민들은 대단히
윤택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들이 하지않는
일을 했기 때문이죠.(어로활동, 해적질, 용병활동)
사이카촌의 주민들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배를
잘 다뤘고 그덕분에 일본의 주요 물자 공급선인 세토내해에서
마음껏 활개치며 해적활동을 했답니다.
그덕분에 그들은 돈도 많이 벌었고, 신무기인 철포도 비교적 빨리 사용하게
되었죠. 그런던 그들이 왜 일향종도가 되었는지는 #13인가에 나와 있을 겁니다.
참조하시길............
아무튼 사이카패는 상당한 재력을 배경으로 많은 철포를(4000~5000정)
보유하고 있었으며, 철포를 다루는 기술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삼단포격술이나 우중화승(비올졔 쏠 수 있음) 같은 것들도 이들이
가장 먼저 개발했죠. 또한 총을 여러개 붙여 한꺼번에 쏘는 산탄
또 총을 좀 큰 모양으로 만든 대구경 총(대포와 흡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총에 관해서는 일본내 최고였죠.
이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특기를 십분발휘 혼간지 수비의 핵으로써
오랜동안 오다군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노부나가는 마침내 기나이의 대명들을 총동원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기이로 출진합니다.
미씨히데를 필두로하여 마쓰나가 히사히데, 쓰쓰이 준께이, 나까가와
기요히데, 호소까와 후지타까등이 이끄는 오다군은 약 6만여명
손바닥만한 사이카촌을 공격한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군이었습니다.
반면 사이카촌은 남녀노소를 모두합쳐 채만여명이 되지 않았을 정도이니
사실상 이 싸움은 싸움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전황은 뜻밖의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초반 기이로 밀어닥친 오다의 대군은 인근의 농민들을 무참히 살육하며
사이카패를 죄어 들어갔습니다.
잇꼬종도를 한명도 남기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오다군은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도 무참히 학살했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잔혹행위는 사이카패의 전의만을 고취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항복해봐야 어짜피 죽는다는 걸 안 사이카촌의 장로들은 결사항전을 결의
곳곳의 진격 예상 루트에 방책을 설치하고 오다군을 공격합니다.
그들은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았기 졸ⁿ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 오다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특히 사이카촌 앞의 강가에서는 멋모르고 진격하던 오다군이
사이카패가 쳐논 그물과 묻어둔 단지에 걸려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손해를 입긴 했어도 여전히 오다군은 엄청난 대군이
었고, 간조시에 강물이 빠지고 강바닥이 드러나자 오다군은 일제히 도강
사이카촌을 공격합니다.
여기서도 사이카패는 정면대결을 피한채 모든 주민들과 함께
마지막 거점인 돌산위에 있는 묘켄산성으로 퇴각합니다.
잇끼들을 공격할 포위공격으로 재미를 봤던 오다군은
제까짓 놈들이 그 산에서 며칠이나 버디겠느냐며 느긋하게 공격했지만
상황은 점점 이상해 지기 시작했죠.
얼마안있어 물자부족으로 항복하리라 생각했던 사이카패는 해상으로
부터 계속해서 물자공급을 받고 있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한
오다수군마저 사이카패의 노련한 공격앞에 전멸당한고 만것이었습니다.
노부나가로서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죠.
이제와서 후퇴하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고, 강공으로 나가려니
피해가 막심할 것 같고. 더구나 당시 혼간지와 동맹를 맺은 모리씨는
혼간지구원을 위한 대군을 하리마 방면으로 진군시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노부나가는 강공이 어렵겠다고 판단. 또한번 조정의 권위를 이용
사이카패와 화친합니다. 물론 문서에는 분명 항복이라고 되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정에대한 사이카패의 항복이었지 노부나가에 대한
항복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사이카패는 항복으로 인해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으니까요.
어손든 문서상으론 항복이었으니 노부나가로서도 최소한의 체면은 차린
셈이었습니다.
이로써 노부나가의 사이카촌 공격작전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노부나가의 기민한 진퇴를 옅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싸움에서 이기진 못했지만 불리한다고 판단되는 순간
피해를 최소화하고 바로 후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노부나가의 탁월한
판단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상경한 노부나가는 이젠 서쪽의 모리씨와 동쪽의 우에스끼라는
두 강적을 상대할 방책을 강구합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히사히데의 모반 上 #28
노부나가가 사이카공략을 중도에 그만두고 교토로 올라온것은
그만큼 상황이 위급하다는 걸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위험은 바로 서쪽의 모리와 동북방면의 우에스끼였죠.
모리씨는 모토나리사후 일시 가운이 기우는듯 했으나 어린 후계자인
데루모토(輝元)를 깃까와 모토하루(吉川元春), 고바야가와 다까가게(小早川隆景)
가 훌륭히 보필하여 다시금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모리씨는 모토나리사후 오랜 숙적이었던 북규슈의 오토모(大友)씨와 화해하고
동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하게 됩니다.
모리씨는 신흥세력 우끼다(宇喜多)씨와 연대하여 친 오다 세력인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등이 차지하고 있는 하리마방면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동쪽의 우에스끼는 역시 혼간지와 동맹을 맺고 잇끼세를 앞세운채 노토로
물밀듯이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노부나가가는 양대 세력중 우에스끼를 보다 강적으로 판단하여 시바다 가쓰이에를
주장으로하여 사쿠마, 삿사, 마에다, 후와등을 에찌젠.가가방면으로
파견하여 잇끼무리들과 다가올 겐신의 공격에 대비토록 하였습니다.
어찌보면 노부나가의 상당한 위기상황이라고도 볼 수 잇었죠.
히사히데의 모반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이루어집니다.
히사이데는 당시 야마토의 시기산성(信貴山城)에서 농성을 준비하며
혼간지,모리,우에스끼등과 연대하여 노부나가에 대항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히사히데의 판단은 상당히 빗나가고 맙니다.
첫째는 히사히데가 반란을 일으키며 혼간지측에 원군을 요청하러 보낸
사자가 오다측에 잡혀버린 것이었고 둘째는 금방이라도 에찌젠으로
쳐들어올듯 했던 우에스끼가 노토만을 점유한채 물러나 버렸기 졸₂潔享윱求.
우에스끼가 물러나 버리자 당연히 노부나가는 휘하의 부대를 총동원
시기산성을 포위해 버렸죠.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건 단순한 사건의 경과는 아닙니다.
문제의 초점은 뛰어난 지략을 자랑하는 히사히데가 왜 하필
그런 시점에서(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반란을 계획 했느냐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히사히데란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사히데는 일찌기 미요시씨의 부하로 있던 동생 나가요리의 추천으로
미요시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후 히사히데는 그 뛰어난 지략을 바탕으로 미요시 나가요시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그후 나가요시의 뛰어난 동생들을 중상모략으로
쫏아내고 사실상 미요시가의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던중 나가요시는 히사히데에 의해 독살되고, 나가요시의 적자였던
요시오끼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히사히데의 독살설이 유력합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미요시부자가 죽자 가독은 나가요시의 양자였던
요시쓰구(義繼)에게 상속되었으나, 이미 미요시가의 모든 실권은
히사히데가 차지한 뒤였죠.
미요시 나가요시가 급작스럽게 죽자 그동안 미요시씨에게 눌려
지내던 장군 요시테루(義輝)는 미요시가가 후계자다툼으로 어지러운 틈을
타 히사히데일파를 제거할 계획을 꾸밉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히사히데에 의해 감지되고, 히사히데는 미요시 삼인방과함께
장군의 처소를 급습 요시테루를 죽입니다. 장군을 죽인다는 건
정말 히사히데가 아니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죠.
요시테루를 죽인 히사히데는 요시테루의 동생 요시아끼마저 감금하고
교토를 완전히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세를 올리던 히사히데에게도 끈질긴 적인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야마토의 호족 쓰쓰이 준께이(筒井順慶)였습니다. 야마토는
바로 히사히데의 거성 시기산성이 있는곳이었죠.
야마토는 본래 호족 쓰쓰이씨에 의해 다스려지고 잇었는데 쓰쓰이씨의
당주 E쇼우가 죽자 가독은 당시 열두살이였던 준께이에게 넘어가게
되죠. 히사히데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야마토를 공략 쓰쓰이씨를
몰아내고 야마토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어린 준께이는 가신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가산중으로 탈출 이후 계속적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히사히데를 귀롭히죠.
다시 돌아와서...........
나가요시 사후 히사히데가 기나이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그때까지 히사히데에게 협력했던 미요시 삼인방은 히사히데에게
자신들의 지분을 달라고 요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기나이를
통채로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가진 히사히데는 미요시 삼인방과
적대하게 됩니다.
이 숨어지내던 쓰쓰이 준께이가 다시 등장하죠. 준께이는 미요시 삼인방과
손잡고 군사를 일으켜 일시 히사히데를 궁지로 몰아 넣지만
히사히데는 일세의 효웅답게 재기. 미요시측이 머물던 도다이사의 대불전을
불사르며 미요시 삼인방을 시코쿠의 아와로 몰아냅니다.
이로써 야마토,이즈미,사까이,교토,셋쓰등 기나이의 대부분은 히사히데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히사히데도 예측치 못한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노부나가의 입경이었습니다.
요시아끼를 앞세운채 박강한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노부나가에게
히사히데는 싸울 의욕을 잃고 항복해버리죠.
이때 요시아끼는 과거의 원수였던 히사히데를 죽여 없애라고 노부나가에게
말하지만, 노부나가는 기나이를 차지하기 위해선 그를 이용해야
한다고 판단 히사히데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중용합니다.
이때 쓰쓰이 준께이도 오다측에 항복 이후 철철지 원수였던 히사히데와
준께이는 이후 히사히데가 모반하기 전까지 기나이 일대에서
함께 작전을 전개합니다.(둘다 야마토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니까요.)
그야말로 吳越同舟라고나 할까요.
이후 준께이는 히사히데의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히사히데의 모반 下 #29
전편에 이어서 계속 하겠습니다.
노부나가라는 강적의 등장으로 미요시 나가요시 사후 잠시동안
기나이의 패권을 차지했던 히사히데는 어쩔 수 없이 노부나가에게
항복합니다. 물론 이건 현명한 판단이었죠. 그에비해 아직까지도 상황
판단을 못하고 있었던 미요시 삼인방은 노부나가의 대군이 밀어닥치자
기나이 일대를 마구 노략질한후 본거지인 시코쿠의 아와로 숨어들어갑니다.
이때 히사히데의 오랜 숙적인 쓰쓰이 준께이도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게
되고 원수였던 둘은 일시 야마토에서 함께 공존하게 됩니다.
이후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의 기나이 공략의 첨병역할을 하죠.
하지만 히사히데는 천하를 잡으려는 야심을 버리지 못했고,
신장포위망 형성시 미요시씨와 손잡고 야마토의 다몬산성에서 반기를 일으킵니다.
물론 같은 야마토의 영주였던 쓰쓰이씨는 이에 대항하였죠.
그러나 아사이,아사쿠라가 몰락하고 미요시 요시쓰구마져 죽자
히사히데는 다시 노부나가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의 휘하로 들어갑니다.
노부나가는 배신자를 극도로 싫어했지만 아직은 자신의 기반이
굳어지지 않았고, 쓰쓰이,미요시,이케다등 기나이의 영주들을
효과적으로 통솔하기 위해선 히사히데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
했기때문에 이례적으로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죠.
이후 노부나가는 몇차례의 위기를 잘 넘기며 마침내 기나이등 일본의
심장부를 완전히 장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필 히사히데가 노부나가의 이러한 판도가
완전히 굳어진 뒤에 반란을 일으켰냐는 것입니다.
기왕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면 훨씬 전 노부나가의 세력이 아직
약했을때 일으켰어야죠.
이점에 대해선 여러분도 상당히 의아해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모리와 우에스끼의 세력이 강대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직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혼간지또한 포위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히사히데를 도울만한 충분한
힘이 있을지는 의문이었죠.
더구나 그당시는 이미 미요시도, 아사이.아사쿠라도, 롯카쿠도, 다께다도...
다시말해 히사히데를 도울만한 영주가 기나이에는 한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몰랐을리 없는 히사히데가
왜 무모한 반란을 계획 했을까요?
전 히사히데는 기나이가 평정된 시점 이미 자신의 존재가치가
사라져 버린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는 자신이 노부나가에게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그는 기나이가 평정되고 자신의 필요성이 사라진 지금
노부나가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죠.
때문에 그는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있던 시기에 반란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히사히데의 모반을 결정적으로 부추긴 것은 모리와
우에스끼의 진공이 아닌 다른 이유였습니다.
당시 히사히데의 본성은 야마토의 시기산성(信貴山城)이었습니다.
시기산성은 그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성으로 일본 최초로
천수각을 만든 유명한 성이죠. 그런데 기나이가 평정된 이후
바로 그 야마토의 수호직을 노부나가는 히사히데가 아닌 쓰쓰이 준께이에게
줘버렸던 것입니다.
히사히데는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쓰쓰이라니...........
쓰쓰이 준께이는 전편에서 말했듯이 야마토의 오랜 호족이었고,
바로 히사히데에 의해 야마토를 빼았긴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히사히데는 그 근거지 다시 쓰쓰이에게 내주게 되었으니....
이는 결국 노부나가가 히사히데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표시였죠.
이러한 이유로 해서 히사히데는 혼간지와 내통하여 반란을 계획하게
되었고, 유능한 인물 답게 치밀한 농성작전을 준비합니다.
히사히데는 자신의 세력이 미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다시말해 야전을 벌일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사전에 많은 물자를 성안으로 반입하여 장기간의 농성채비를
갖춥니다.
그와 혼간지의 계획은 이러했습니다.
우에스끼가 가가 에찌젠으로 밀어닥치면 노부나가는 그를 상대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틈에 히사히데는 야마토에서 반기를 일으킨다.
히사히데의 반기와 함께 혼간지는 기나이의 잇끼들을 대거 봉기시킨다.
또한 모리는 하리마로 진군 혼간지의 포위망을 풀고 노부나가를 타도한다.
뭐 대강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선 히사히데가 시기산성에서 끈덕지게
농성하며 어느정도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죠.
마침내 히사히데는 우에스끼의 거병소식을 듣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히사히데와 혼간지측의 작전은 시작부터 틀어져 버립니다.
우에스끼는 거병하긴 했지만 의외로 노토만을 점령한채 물러가버리고
우에스끼군이 물러가자 오다군의 창부리는 온통 시기산성으로 집중됩니다.
더구나 반란직후 혼간지측에 보낸 사자가 어이없게도 오다군에
잡혀버리죠.
이로써 혼간지와의 동시 봉기또한 실패하게 되고, 역으로 잡혀간
使者가 오다측에 붙어서 오다군을 혼간지 문도병으로 위장시킨채
시기산성으로 들여보내죠.
이렇게하여 히사히데 심혈을 기울여 쌓은 난공불락의 명성 시기산성은
어처구니 없이 함락되고 맙니다.
일이 틀어진 것을 안 히사히데의 병사들은 대부분 도망치거나
항복하고, 결국 그의 곁에는 단 수백의 병사만이 남게 되었죠.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히사히데의 처참한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히사히데는 일족과 함께 본성으로 들어가 부하들이 마지막으로
저항하는동안 할복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히사히데는 할복도 참 재미있게 하죠.
히사히데는 할복직전 자신의 부하에게 정수리에 뜸을 뜨게 했답니다.
이유인 즉슨 자신은 중풍기가 있어 자칫 할복하다 실수하면 무명에
오점이 생김으로 그것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답니다.
또한 그는 죽기전에 천하제일의 보물인 차솥 히라구모를 깨뜨리며
죽는 마당에 이런것이 무슨소용이 있겠느냐며 그동안 자신이 수집했던
명기들을 모조히 부숴버렸다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인 히사히데의 성격을 반영했다고나 할까요...)
이로써 일세의 효웅이었던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날은 바로 예전에 그가 미요시삼인방과 싸우던 당시
도다이사의 대불전을 불태운 날과 같았다고 합니다.
(도다이사의 대불전을 소실시킨것은 그의 큰 악행으로 유명하죠)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히사히데가 대불전을 태운 죄때문에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실상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일약 천하의 주인으로 떠올랐다가
노부나가라는 인물에의해 묻혀진 히사히데......
전 개인적으로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에서 죽었거나 또는 상경이 좀
늦어졌다면 바로 이 히사히데가 천하를 제패할 확률이 가장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뛰어난 두뇌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 당시 기나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또한 그는 覇者의 제일 조건인 野望이 그 누구보다도 뛰어 났었다고
봅니다. 노부나가에게 끝까지 반항한 것도 그가 그러한 야심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죠.
한가지 덧붙이자면 히사히데와 쓰쓰이 준께이의 관계를 보며
인간사라는 건 정말 알 수 없구나 하는 점도 느꼈답니다.
(이후 야마토는 결국 쓰쓰이씨의 수중으로 들어갑니다.)
다음 번엔 노부나가의 주코쿠 공략에대해 쓰기로 하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겐신의 죽음 #30
우에스끼 겐신은 본 이름은 나가오 가게도라였습니다.
그는 에찌꼬의 수호대리로 있던 나가오 다메가게(長尾爲景)의 막내아들이었죠.
그러나 에찌꼬의 수호대리로 주가인 우에스끼씨보다도 막강한 힘을 과시하던
다게가게는 엣쥬의 잇끼를 토벌하러 출진했다 전사하고 맙니다.
당시 가게도라는 아직 어린아이였죠.
이후 가독은 다메가게의 큰아들인 하루가게에게 넘어가게되고,
무능한 하루가게는 그의 아버지가 애써 이루어놓은 에찌꼬의 패업을
거의 까먹고 말죠. 다시말해 이찌꼬는 다메가게 사후 나가오일족이
사분오열되고 할거하는 형국으로 바뀝니다.
이때 가게도라는 에찌꼬의 호족중 하나인 우사미 사다유끼의 지원을 받아
에찌꼬의 여러 실력자들을 평정하고 마침내 그의 형 하루가게로부터
에찌꼬의 수호대리직을 넘겨 받습니다.
이후 가게도라는 인근의 세력들을 차례로 평정 에찌꼬에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게 되고, 신슈의 지배권을 놓고 다꼐다 하루노부와 대결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관동관령이었던 우에스끼 노리마사로부터 급보가 옵니다.
당시 관동관령이라는 직책을 세습하고 있던 名家 우에스끼씨는
과거의 위세를 잃고, 신흥세력인 호조씨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호죠씨의 당주는 명자 우지야쓰였죠.
전통과 가문을 중시하는 가게도라는 노리마사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대군을 이끌고 호죠와 대결하기 위해 출진합니다.
가게도라의 강군과 싸우길 꺼려한 우지야쓰는 오다와라성에서
농성을 하였고, 결국 가게도라는 군대를 이끌고 에찌꼬도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비록 승리는 거두지 못했지만 나가오 가게도라는
그 무명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고, 이후 우에스끼 노리마사로부터
우에스끼성과 관동관령을 직책을 넘겨받습니다.
그리하여 나가오 가게도라는 우에스끼 마사도라로 개명하죠.
(마사도라는 뒤에 불문으로 들어가 겐신으로 다시 개명합니다.)
이후 겐신은 다께다씨와 대립하며 차츰 그 영토를 넓혀갔고,
다께다 신겐이 죽은 이후에는 놀랍게도 가쓰요리와 동맹을 맺고,
오다씨와 대결하기 위해 노토를 공략합니다.
당시 노토를 다스리고 있던 하타케야마씨는 가신들이 친 오다측과
친 우에스끼측으로 갈라져서 내분에 빠져 있었고, 불패의 장군
겐신을 앞세운 우에스끼군은 순식간에 노토를 점령해버리죠.
노토를 차지한후 잠시 에찌꼬로 돌아갔던 겐신은 이듬해 다시 군사를
일으켜 가가, 에찌젠의 공략을 시도합니다.
당시 에찌젠은 시바다,삿사,사쿠마,마에다,후와등이 지키고 있었죠.
시바다등 오다군은 우에스끼군에 대항하여 여러차례 전투를 벌이지만
싸우는 족족 패하였고, 겐신은 노토에 이허 가가와 에찌젠의 절반정도를
수중에 넣습니다.
오다측의 장군들은 패전하여 에찌젠 각지의 성에서 농성중이었죠.
그러나 에찌젠을 거의 차지하고 노부나가와의 일대 결전을 앞둔 순간
겐신은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우에스끼가는 혼란에 빠집니다.
겐신은 어찌된 영문인지 평생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승려와 같은
금욕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그는 결혼을 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자식도 없었죠. 당시 그에게는 가게가쓰와 가게도라라는 두명의
양자가 있었는데 이 두명의 양자는 이후 가독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전개합니다.
호죠 우지야쓰의 아들이었던 가게도라는 호죠씨의 힘을 빌어
가게가쓰를 치려했고, 겐신과 같은 나가오 일족인 나가오 마사가게의
아들이었던 가게가쓰는 다꼐다 가쓰요리에게 도움을 요청 결국
가쓰요리의 지원을 받은 가게가쓰측이 싸움에서 승리 가게도라는 죽고,
가게가쓰가 우에스끼가를 계승하게 됩니다.
다께다가는 이후 원조의 대가로써 금광을 차지하게 되지만, 호죠씨와는
관계는 아주 험악해지죠.
아무튼 겐신의 죽음과 그 이후의 집안싸움으로 우에스끼씨는 크게
약화되었고, 시바다 가쓰이에등 에찌젠의 오다군은 우에스끼군을 대파하고
가가와 노토를차지합니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큰 근심거리 하나를 덜게 되었고, 주코쿠 공략에
힘을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어찌보면 노부나가의 억세게 좋는 운중 하나였는지도 모르죠.
좌우지간 일세의 영웅이요 불패의 명장이었던 겐신은 이렇게 해서
죽고 맙니다. 겐신은 사실 전국시대 무장중에선 정말 특이한 인물이었죠.
그는 싸움을 즐겼으나 노부나가나 신겐처럼 모략을 쓰지는 않았죠.
또한 어떻게 보면 멍청하리만큼 아시카가 막부에대한 충심이 강했습니다.
그러한 그의 성격을 말해지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게
마칠까 합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패사하자 신겐은 혼란에 빠진
이마가와씨의 영지를 집어삼키기 위해 장자를 죽여가면서 까지
이마가와씨와 단교하죠.
이에 격분한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가히로의 소금 공급을 끊어 버립니다.
당시 내륙지방이었던 다께다씨는 동해도의 이마가와측으로부터
소금을 사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미가와씨가 소금공급을 막자 가히의 주민들은 소금부족으로 고생을
하게 되었죠.
이 소식을 들은 겐신은 뜻밖에도 다량의 소금을 다께다측에 지원하는데...
그는 무사는 칼과 활로 승부를 가려야지 그런 비겁한 수를 써선
안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주꼬꾸 공략 上 #31
였습니다. 히데요시는 그때까지만해도 오다 가문에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지는 못했습니다. 어찌보면 그러한 히데요시에게 대임을 맡긴것은 그만큼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의 능력을 인정했고, 또 그를 믿었다는걸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모리씨는 우끼다와 연합하여 히데요시측에 붙어있던 하리마의
벳쇼 나가하루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겐신이
건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많은 병력을 줄 수
없었고, 히데요시는 자신이 가지고있는 오오미의 약 12만석에서 나오는
병력과 그 부하들(하치스카 고로쿠, 하시바 히데나가등등)의 병력을 합쳐
채 만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모리군에 맞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빗추와 비젠에 포진해 있던 모리.우끼다연합군은 그 수가
4~5만에 달했죠. 때문에 히데요시는 벳쇼등 하리마의 영주들을 최대한
포섭 이용하려 하였고, 한편으론 아마꼬 가쓰히사, 야마나까 시카노스케등
아마꼬씨의 잔당을 이용하여 주코꾸 공략의 물고를 트려 하였습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문제의 인물인 야마나까 시카노스케(山中鹿之介)
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습니다.
시카노스케는 아마꼬씨가 모리의 책략에 말려 거의 멸망해가던 무렵
10대의 청년무장이었습니다. 당시 아마꼬가의 당주였던 하루히사(晴久)는
모리 모토나리의 책략에 말려 가중 제일의 용장이요, 하루히사 자신의
숙부였던 쿠니히사(國久)를 불러 도중에 죽여버립니다.
그 자리에서 쿠니히사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죽고말죠.
이때 쿠니히사의 손자였던 두살박이 마고시로만이 유모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하루히사의 손을 피해 쿄토로 도망칩니다.
이후 아마코씨는 급속히 쇠퇴하였고 결국 모리씨에 의해 멸망하고 말죠.
이후 가문 재흥의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시카노스케는 상경하여
당시 불문으로 들어갔던 마고시로를 환속시키고, 마고시로는
가쓰히사(勝久)로 개명합니다.
가쓰히사를 옹립한 시카노스케는 노부나가와 오토모 소린의 지원을 받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이즈모를 장악하죠.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깃까와 모토하루의 공격을 받아 시카노스케는 포로로 잡히고 맙니다.
그러나 끈질긴 시카노스케는 천신만고끝에 탈옥, 다시 상경하여 이번엔
하시바군에 소속되어 주꼬꾸공략의 선봉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시카노스케의 꿈은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죠.
모리측에 비해 히데요시의 병력이 형편없이 약세라고 판단한
벳쇼 나가하루는 전 병력을 미키성(三木城)에 집결시켜 농성준비를 한 후
모리군을 하리마로 끌어들입니다. 나가하루에게 뜻밖의 배신을 당한
히데요시는 깃까와 모토하루(吉川元春), 고바야가와 다까가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모리의 4만여 대군에 밀려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당시 하리마의 고우츠끼성(上月城)을 지키고 있던 아마꼬세력은
결국 모리군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당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상황설명을 하면서 원군을 요청했지만
노부나가는 그들(아마꼬勢)은 그냥 버리고 퇴각하라고 했다 합니다.
결국 고우츠끼성의 싸움에서 천여명의 아마꼬군은 대부분 전사하고,
아마꼬 가쓰히사도 전사하고 맙니다. 일말의 희망을 걸고 항복했던
시카노스케도 결국 처형되고 말죠. 이리하여 아마꼬가의 재흥 운동은
노부나가에 의해 철저히 이용만 당한채 비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노부나가는 급히 모리군에 대응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하지만
미키성에 농성하고 있는 벳쇼군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전황은
교착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장기인 병령전술을 사용
미키성의 병참선을 끊으려 하였지만, 모리측의 해군이 계속해서 미키성에
물자를 공급하고 있어,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육지에선 누구못지않은 지략을 자랑하는 히데요시였지만 바다의 싸움에는
문외한 이었으니까요. 이는 그의 참모였던 다께나카 한베에나
구로다 간베에도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세토내해의 해상권은 친모리측 해적대명들의 。이었습니다.
때문에 노부나가는 해적출신인 구키 요시타카에게 비와호에서 이제까지
없었던 대규모 전함을 건조하게 합니다. (당시까지도 일본의 조선술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해적들의 배 또한 대부분 소규모 전함이었죠.)
모리씨와의 싸움은 이제 해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주꼬꾸 공략 中 #32
우리나라에선 그 어느라나보다도 人事가 중시된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人事가 萬事라는 얘기도 나왔죠.
다시말해 이 사람을 어떻게 발탁하고 어떻게 쓰느냐는 당시
전국대명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였다는 겁니다.
멋모르고 히사히데같은 야심가를 키운 미요시 나가요시는 결국
그에게 살해되었고, 오와리의 시바씨라든지 미노의 도끼씨등 사람을
잘못써서 망한얘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반면 진흑속의 진주같은 인재를 발탁하여 요긴하게 써먹은 영주들도
많았죠.
그런데 이 인재라는게 발탁만 잘한다고 끝나는건 아니죠.
그보다 더 중요한건 어떻게 그 인재를 완전한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충성을 다 바치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측면에서 볼 때 노부나가는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반면 그 인재를 완전히 자기사람으로 포용
하는데는 능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옛말에 勇將위에 知將이요, 知將위에 德將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만큼 주인(장군)의 적목중에선 德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죠.
제 생각에 노부나가는 지용은 두루 겸비했으나, 덕이라는 측면에선
대단히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노부나가는 부하들을 덕으로써 부렸다기보다는 공포로써 부렸죠.
노부나가의 부하들은 대개 그의 탁월한 지용에 놀라워 하면서,
그의 뜻대로 비위를 맞추기 급급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노부나가는 일단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는 인물은 가차없이
제거해버리는 그야말로 인정사정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전 노부나가의 비참한 죽음과 그 이후의 오다가의 멸망은 바로
그러한 그의 냉혹한 성격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노부나가가 죽을 당시 오다가를 위해 충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정도 밖에 없었죠.
노부나가가 그토록 총애하던 히데요시가 오다가를 송두리패 집어
삼킨것도 결국은 히데요시의 충심이란게 노부나가의 눈총을 피하기 위한
거짓된 행동이었다는 걸 반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거 서론이 너무 길어진 것 같군요.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노련한 모리수군에 연이어 패배를 거듭하던 오다군은 해적출신 대명인
구키 요시타카의 비장의 신무기인 철갑선으로 새롭게 무장한 뒤 오사카만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당시 구키가 만들었다는 철갑선은 대형 전함의 윗면에
장갑을 입힌 정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당시로선 그 정도도 대단한 것이었겠죠.
좌우지간 구키의 철갑선은 당시 해적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본격적인 전함이었고, 강력한 대포도 달려 있었습니다.
반면 모리측의 함선들은 그야말로 소규모 해적선 집단에 불과했죠.
배의 수효는 많았지만 크기로는 도저희 구키의 전함에 비할바가
아니었습니다.
오다수군이 혼간지의 보급선을 끊기위해 오사카만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모리측은 곧 구로지마,고지마,인노지마,고다마등 해적대명들을
총동원 50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오다군과 일대 결전을 벌입니다.
전투의 서반은 역시 수전에 능한 모리군의 페이스였습니다.
모리군은 나룻배에 대규모 목초와 화약을 실어 불을 붙인 후
오다측에 떠내려 보내는 방법으로 무수한 오다측 전함을 불태웠고,
불화살 공격으로 역시 오다측의 소규모 함선들을 대다수 침몰시켰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구키의 대규모 전함이었죠.
사실 구키의 전술은 그야말로 단순 했습니다.
구키는 대규모 함선을 모리군 정면으로 돌진시켰고, 모리측의 선박은
부디시기만 해도 대부분 부서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한 불화살대신 강력한 대포로 포격 모리측의 대장선 여러척을 격침
시키죠.
결국 대장선을 잃고 중앙을 돌파당한 모리수군은 사분오열되었고,
오다측은 해전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역사상 이 싸움은 나가시노전투에 비견될 만한 전투라고 하며
나가시노 전투가 육지에서의 오다군의 실력을 보여준 전투라면
오사카만에서의 해전은 바다에서의 오다군의 위용을 과시한 전투였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새토내해의 해상권은 모리에서 오다측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간 모리로부터 해상지원을 받아오던 혼간지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맙니다.
또한 미키성에서 농성중이던 벳쇼 나가하루도 해상지원이 끊겨
상당한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죠.
이런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데 그건 바로
셋쓰의 수호인 아라끼 무라시게(荒木村重)의 배신이었습니다.
제가 서두에서 길게 설명했던 것은 사실은 바로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누가보던지 오다측에 유리한 상황이었고, 혼간지는
해상지원마저 끊겨 그야말로 孤立無援의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오다를 배반하고 혼간지측에
붙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라끼 무라시게는 결코 멍청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전국시대의 상황을 잘 이용하여 일개 부장에서 영주급까지
올라선 대단한 인물이었죠. 또한 그를 셋쓰의 수호직에까지 올려준
것도 사실은 노부나가였습니다.
셋쓰의 주인이었던 이케다씨의 일개 무장에 불과했던 무라시게는
노부나가의 입경후 그와 통하여 이케다씨를 몰아내고 셋쓰를 차지하죠.
그 후 무라시게는 기나이의 평정과 혼간지 공격등에서 많은
공을 세웁니가. 그러던 그가 왜 갑작스럽게 승산도 없는
모반을 감행 했을까요?
전 그 이유가 노부나가의 부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무라시게의 모반은 당시의 노부나가에게 있어 놀라운 일일지는
모르지만 치명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 만큼 무라시게의 모반은
어이없는 것이었다는 거죠.
무라시게의 모반 원인은 확실치는 않지만 일단은 그가 노부나가의
의심을 샀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혼간지를 거의 제압하기 직전 노부나가에게 무라시게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들어옵니다.
노부나가는 바로 진상조사를 명령했고, 무라시게에게 모친을
인질로 바치고 상경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무라시게는 상경을 거부한채 아리오카성에서 농성으로 들어갑니다.
무라시게는 당시 노부나가의 포악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기나이의 예전 영주들이 대부분 그의 책략에 말려 멸문 당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노부나가는 이세의 기카바다께 집안과 간베집안에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보내 가독을 상속케 하여, 실질적으로 그 두 가문을
흡수한 예가 있었고, 그 밖에고 무수한 기나이의 중,소영주들의 영지를
빼았은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빼앗은 영지들은 대개 오다가의 신하들에게 나눠지게
되었죠.
때문에 무라시게는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상경을 명한것을 죽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모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무라시게가 순순히 인질을 보내고 상경했다면, 노부나가는
순순히 그를 용서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라시게는 공포감에 못이여 상경을 거부했고, 결과는 파멸로
나타나죠.
무라시게의 모반에 대노한 노부나가는 미쓰히데등 고기나이의 영주들에게
명해 아리오까성을 공격하라 명했고, 무라시게는 처자마저 버린채
도망쳐 버립니다. 일생을 거쳐 이룩한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죠.
어찌되었던 오사카만에서의 승리와 무라시게의 토벌로 오다측의
기세는 한층더 올라갔고, 혼간지측은 점점더 어려운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과연 혼간지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제목 : [幸村/기타]Ξ 이시야마 혼간지의 함락 #33
오사카만에서 모리수군이 대패를 당하자 혼간지측으로의 해상 물자
보급은 사실상 끊기게 되었습니다.
반면 오다측은 이 해전의 승리에 힘입어 각지에서 파죽지세의 공격을
해대고 있었습니다.
아케찌 미쓰히데는 단바의 하타노씨를 거의 굴복시켰고, 아라키 무라시게의
아리오카성도 오다군에 의해 손쉽게 함락되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카가오 기요히데, 다카야마 시게토모등 주요 부하들이 모두 배신해
버린 무라시게는 처자마저 버린채 도주해 버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젠의 우키다 나오이에(宇喜多直家)가 모리와
손을 끊고 히데요시와 내응 주꼬꾸의 전세는 단번에 모리측에서
히데요시측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미키성을 구원하기위해 출진했던 모리군은 우끼다가 배신했던 소식을
듣고 퇴각하기 바빴고, 혼간지측을 지원하던 모리군도 속속
귀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리군이 물러나자 끊질기게 버티던 미키성의 벳쇼일족도
결국 하시바군의 식량공세에 굴복 함락되고 맙니다.
믿었던 모리군에게마저 더이상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된
이시야마 혼간지는 개산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노부나가는 궁지에 몰린 혼간지를 무혈 점령하기 위하여 조정에
압력을 가해 혼간지와의 和議를 이루려 합니다.
그러나 이 和議는 말이 和議지 일방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나
진배 없었습니다.
그러나 절박한 상황에 몰린 혼가지측은 이러한 조건마저 거절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혼간지의 수비를 맡고있던 시모쓰마 요리카도는 겐뇨에게
노부나가와 화친할 것을 건의하고,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겐뇨는 이 화의를 승낙합니다.
이후 겐뇨는 모든 권한을 아들인 교뇨 미쓰히사에게 이양한채
사이카로 은거합니다.
그러나 이시야마 혼간지의 항복은 이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 종정인 교뇨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들은 이제와서 항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결사항전을 주장합니다.
사실 아직도 혼간지내에는 수만의 문도병들이 있었고, 물자또한 그리
절박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강경파들이 결사항전을 주장한 이유는 다른곳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혼간지의 문도병들은 대개 기나이 내지는 이세, 에찌젠에서 모여든
신도들이었고, 이들은 혼간지가 항복할 경우 기나이의 잇꼬종도들이
나가시마나 에찌젠에서 처럼 몰살당할 위험이 있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또한 강경파의 중심격이었던 사이카패는 이대로 물러날 경우
노부나가와 쌓인 원한이 많은 자신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였습니다.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지자 노부나가는 혼간지의 문도들에게
얌전히 물러나면 절대 공격하지 않겠다고 전했으면, 은거한 겐뇨도
신도들에게 더이상 싸우지 말고 물러날 것을 권유 결국
이시야마 혼간지는 노부나가와의 10년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이시야마 혼간지의 함락은 그야말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통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기점을 상정할 때 그 나라의
중앙집권이 어느정도 되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당시의 일본은 그때까지도 중앙집권이란 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였죠. 또한 이시야마 혼간지로 대표되는 사원 세력들도 그 위세가
대단하여 그 어떤 영주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다시말해 이들 사원세력을 혁파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중앙집권을 이룰 수
없고, 근대사회로의 진입도 어려웠다는 거죠.
때문에 일본의 사가들은 대부분 혼간지의 종정 겐뇨 고사를 노부나가의
최대 라이벌로 꼽으면서, 기나이에서 벌어진 싸움을 신 세력인 노부나가와
구세력과 사원세력을 대표하는 혼간지의 세력다툼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과거 10년간 노부나가와 끈질기게 싸워왔던 이시야마 혼간지는
결국 노부나가에게 무릅을 꿇게되고, 기나이는 완전히 평정되게 됩니다.
사실 이 시점에서 노부나가의 전국제패는 거의다 이루어 졌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노부나가는 중앙에 앉아서 각지에 나가있는 군단장들의 승전보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죠.
이제 저의 연재도 막바지로 가는 것 같군요.
이 뒤의 일들은 사실 역사적으로 별로 중요한 사안이 아닌만큼
대강 뭉뚱그려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양해하시길...............

제목 : [幸村/기타]Ξ 복수정치와 공포정치 #34
이시야마 혼간지라는 최대 숙적을 제거한 노부나가는 당시
상당한 포만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부나가의 포만감과 이제 다 끝났다는 자신감은
토사구팽의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노부나가는 혼간지 함락후 그동안 자신에게 충성을 바쳐왔던
사쿠마 노부모리와 하야시 미치까스, 안노 나오모리들을
유패 또는 추방시켜 버립니다.
특히 사쿠마 노부모리의 경우는 오다가의 사실상 최고 서열의 장수였고
5개국 이상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동안 죽 혼간지포위를 지휘해 왔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이들 중신의 과거의 사소한 잘못과 한때 자신에게
맞서려 했다는 것을 빌미로 가혹한 숙청을 단행합니다.
그러나 토사구팽의 절정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이에야쓰의 장남인 노부야쓰를 할복시킨 것이었죠.
사건의 발단은 노부야쓰의 모친인 쓰기야마부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에야쓰의 첫번째 부인인 쓰기야마는 본래 이마가와측 무장의 딸이었습니다.
쓰기야마부인과 이에야쓰는 이에야쓰가 아직 이마가와의 그늘아래
있을 때 정략적 혼인을 맺죠.
하지만 이후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패하면서 이에야쓰는
이마가와와 절연하고 오다와 동맹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마가와측에서 시집온 쓰기야마부인은 당연히 경원시
되었죠.
때문에 그녀는 노부나가에 대한 원한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에 다께다측의 밀정이 쓰기야마부인에게 접근하여
당시 오까자끼성의 행정관이었던 오오가 야시로란 자와함께
모반을 꾀하도록 획책합니다.
다께다측은 오까자끼에서 모반이 일어나면 하마마쓰의 이에야쓰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에야쓰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반은 밀고로 인해 발각되고, 모반은 쉽게 진압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죠.
노부야쓰의 부인이었던 도쿠히메는 노부나가의 딸로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노부야쓰에게 시집을 왔었습니다.
그런데 도꾸히메는 시어머니인 쓰기야마부인으로부터 오다의 딸이란
이유로 많은 구박을 받았고, 남편인 노부야쓰도 도꾸히메의 처소엔
거의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분개한 도꾸히메는 아버지인 노부나가에게 노부야쓰가 이번
반란사건에 관여했다는 듯한 서신을 보내고, 이에 노부나가는
이에야쓰에게 노부야쓰를 할복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사실 오오가야시로와 쓰기야마 부인이 모반을 계획했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도꾸가와가의 후계자인 노부야쓰가 모반을 꾀했다는 건
사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에야쓰는 여러차례 노부나가에게 아들의 사면을 탄원하지만
노부나가는 끝끝내 거절하죠.
결국 노부야쓰는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사실 이 사건은 이에야쓰에대한 노부나가의 일종의 시험이라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네가와싸움때까지만 해도 오다와 도꾸가와는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관계로
서로 동업자적인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나가시노 합전에서 이에야쓰가 노부나가의 큰 빚을 지면서
부터 상하관계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혼간지가 함락된 이후엔 그 격차가 더욱커졌고, 관직서열로도
당시 노부나가가 우대신인데 비해 이에야쓰는 5품정도의
낮은 벼슬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노부나가는 이미 천하의 지배자로 행세하고 있었으며,
이제 동맹세력따위는 더이상 필요치 않다는 자세였습니다.
이제 그에겐 과거의 맹우였던 이에야쓰도 한낮 지방영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갈등에서 이에야쓰는 노부나가에게 굴복하고, 게속해서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다할것을 암묵적으로 맹세합니다.
노부나가의 잔인하고 비정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죠.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하듯...
위기에 처해있을 때와 그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의 노부나가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무사들이 중시하던 명예나 의리, 신의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고, 마키아벨리스트였죠.
어쩌면 그러한 노부나가의 잔혹한 면이 그의 가장 큰 성공요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들지 않던 가신들을 제거하고, 이에야쓰의 충성도 다시금
확인한 노부나가는 남아있는 잔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각지로
병력을 파견합니다.
단바,단고 방면에선 미쓰히데가 빗츄방면에선 히데요시가
엣쥬방면에선 시바다가 각각 노부나가의 영지를 늘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노부나가는 과거 차남 노부까쓰가 한차례 공겨했다 실패한
이가를 재차 공격, 노부까쓰를 주장으로 하는 5만여 대군을 투입
이가 산중의 닌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립니다.
모모치 산다유(百地三太夫)로 대표되던 이가의 닌자들은 전래의 인술을 써가며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노부나가의 대군에 몰려 대부분 죽고 맙니다.
사실 이가지방은 전략적으론 별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가 닌자들이 뚜렷히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구요.
이가지방은 거의가 산지였고, 때문에 농사로 먹고살기 어려웠던
이가 사람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인술을 익혀 각지에 영주들에게
고용되어 고향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실 일종의 용병집단이었을 뿐 어떤 뚜렷한 세력이라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가 이들을 가혹하게 공격했던 이유는 오직 한가지
자신에게 패전을 안겨 주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노부나가는 복수심이 대단한 인물이었죠. 또 한번 맺은 원한은
시일이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풀고야 마는 성격이었습니다.
노부나가의 이와같은 가신숙청과 복수정치는 다른 가신들에게도
상당한 공포감을 형성시켰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점에서 전 노부나가는 전국시대와 같은 난세에나 어울리는 인물이지
치세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롬웰이나 로비에스피에르같은 공포정치가들이 대부분 뒷끝이
좋지 않았던 이유도 결국은 그들이 인치가 아닌 지나친 법치 더
나아가서는 백성들을 공포와 무력으로 다스리려 했던 것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다께다가의 멸망 #35
사실 다께다가는 나가시노 전투 이후 이미 과거의 힘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께다가의 멸망자체가 가지는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중앙통일이후의 지방 잔여세력 제거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나가시노전투로부터 7년뒤 마침내 다끼가와 가즈마스가 이끄는
군대가 이에야쓰와 연합하여 다께다 정벌을 시작합니다.
당시 다께다 정벌을 하게 되었던 결정적 계기는 다께다가의
두 중신이었던 기소 요시마사(木曾義昌)와 아나야마 노부끼미의 내응이었습니다.
기소 요시마사는 가쓰요리의 처남으로써 요충지인 기소계곡을 수비하고
있었으며 지략이 매우 뛰어난 무장이었습니다.
모반의 계기는 이러했습니다.
가쓰요리는 우에스끼가의 상속문제에서 가게가쓰의 편을 들게
됨으로써 우에스끼가와는 동맹을 맺을 수 있었지만, 반면 가게도라를
지원했던 호조씨와는 원한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에야쓰는 호조씨와 연합 다께다가를 압박하기 시작했죠.
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가쓰요리는 내륙의 산중에 수비를 위한
축성을 요시마사에게 명합니다.
그러나 이 공사는 빈약하기 이를데 없었던 다께다가에게는 벅찬
일이었고, 요시마사는 수차례에 걸쳐 공사가 너무 늦다는 질책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시마사는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오다측에 넘어가게 되죠.
그러나 요시마사보다 더 결정적인 인물은 역시 다께다일족의
수장격인 아나야마 노부끼미(穴山信君)였습니다.
나가시노 전투 편에서도 설명 드렸듯이 아나야마 노부끼미는 다께다
일족의 수장이었고, 때문에 가쓰요리를 상당히 경시했다고 합니다.
정세 판단에 능했던 그는 더이상 다께다가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
이에야쓰를 통해 노부나가에게 항복합니다.
아나야마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부분의 다께다 일족들은
가쓰요리의 출격명령을 거부한채 각자의 성으로 몸을 숩깁니다.
일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가쓰요리는 사실상 움직일 수 있는 군사가
수천에 불과했고, 사나다 마사유끼가 쌓고있던 비장의 요새
신뿌성(新俯城)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당시 오다,도꾸가와 연합군은 요시마사와 노부끼미의 인도아래
별다른 저항없이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저항다운 저항을 한 장수는 가쓰요리의 동생인
다까도오성(高遠城)의 니시나 모리노부(仁科盛信) 한명뿐이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가쓰요리에게 일찌기 다께다가의 가신으로 있다가
당시엔 사실상 독립상태였던 사나다 마사유끼가 자신의 영지로 피신할 것을
권유합니다. (의리를 중시하는 마사유끼의 성격이 드러나는 장면이었죠.)
하지만 가쓰요리는 이미 독립한 사나다쪽보다 오랜 중신이었던
고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信茂)쪽을 택했고, 결국 고야마다는 가쓰요리를
배신하고 그를 죽여 오다에게 넘기려 합니다.
노부시게의 배신을 안 가쓰요리는 마지막까지 남은 처자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습니다.
당시 16세로 가독상속의 때를 맞은 가쓰요리의 장남 노부까쓰(信勝)도
가쓰요리의 뒤를따라 할복함으로써 다께다가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죠.
이로써 쓰루가,가히,시나노,고즈께를 평정한 노부나가는 쓰루가를
이에야쓰에게, 가히를 가와지리 히데다까(河尻秀隆)에게, 시나노를
다끼가와 가즈마사(瀧川一益)에게 각각 하사합니다.
특히 가즈마사는 관동관령으로 임명 장차 관동지방의 경략을 맡깁니다.
노부나가는 다께다공략에서도 그의 잔인성을 유감없이 발휘
대부분 싸우지 않고 성에 들어 앉았던 다께다가의 구신들도 거의다
죽이고 영지를 몰수 합니다.
주인을 배신했던 고야마다도 예외는 아니었죠.
영지를 보존한건 기소 요시마사와 아나야마 노부끼미 뿐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일찌감치 자신에게 항복했던 자들만을 용서 한 것이었죠.
여기서 잠시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성격을 비교할 수 있는
예를 들겠습니다.
주꼬꾸공략중 다께다가의 멸망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가쓰요리의
죽음을 상당히 애석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다께다 시로(가쓰요리)는 무용이 뛰어난 인물인데 그렇게 죽었다니
매우 아깝다. 나라면 그에게 가히,시나노 이국을 주고 관동정벌의
선봉으로 썼을텐데....."
이는 이후의 히데요시의 구주정벌에서 거의 비슷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히데요시는 주꼬꾸의 모리와 시꼬구의 죠소까베를 싸움없이 항복시키고
그들의 군대로 하여금 구주정벌의 선봉을 서게 하죠.
제가 볼때는 바로 이점이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노부나가는 속이 좀 좁은 인물이었죠. 때문에 자신의 적은
절대 용서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그 적을 자신의 수하로
부린다는 건 더더욱 있기 어려운 일이었죠.
반면 히데요시는 한 때 적이었던 상대들도 쉽게 포섭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 그와 적대했던 서국 영주들이
세끼가하라에서 도요토미쪽에 섯던 것을 보면 그의 포용력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쉽게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노부나가는 전후의 영지분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믿을만한
심복부하들에게만 영지를 배분했지, 그 밖의 재지영주들은 거의
등용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면에서 본다면 이에야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죠.
이에야쓰는 심복부하들에게도 거의 영지를 나눠주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아들들에게만 영지를 나눠 줬답니다. 3살,4살된 아들들에게
70만석의 영지를 배분한 인물이 이에야쓰였죠.
과연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 방법일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주꼬꾸 공략 下 #36
우끼다 히데이에의 도움과 해전에서의 승리로 벳쇼 나가하루의 미키성을
함락시킨 히데요시는 이나바의 돗토리성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립니다.
모리측은 이에 대비하여 깃까와 쓰네이에를 돗토리 성으로 파견합니다.
그러나 당시 모리측은 예상보다 빠른 히데요시의 진격에 충분히
대비치 못한 상황이었고, 오우치잔당, 우끼다 나오이에등에 의해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성장으로 파견된 쓰네이에는 그리
많은 병력을 끌고 가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돗토리성은 쉽게 함락될 만한 그런 성은아니었습니다.
제1,제2,제3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성곽에 강까지 끼고 있어, 미키성
못지않은 대단히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때문에 히데요시는 정면공격은 어렵다고 판단 미키성과 같이 식량공세로
적을 무찌르려 합니다.
히데요시는 식량공격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기 위해 출진전에 미리
상인들을 풀어 이나바일대의 쌀을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매점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농성중이던 모리군은 충분한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죠.
이리하여 돗토리성을 포위한 히데요시는 견고한 방책을 설치한 채
장기간의 포위공격을 가합니다.
결국 얼마 안가 돗토리성의 식량은 바닥을 보였고, 결국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의 상황이 된 모리군은 히데요시측의 항복안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히데요시의 항복안은 대단히 관대한 것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성주인 깃까와 쓰네이에만 할복한다면 다른 이들은
모두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실 성을 잃은 성주는 거의 자결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는 걸
생각한다면 히데요시의 처분은 정말 관대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시 히데요시가 강공으로 밀어 붙였다 하더라도 오랜 굶주림으로
지쳐있던 모리군은 거의 반격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 돗토리성은 함락되었고, 無名의 히데요시는 일약
명장으로 주꼬꾸 일대에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이후 벌어지게 되는 싸움이 바로 쭈꼬꾸 공략의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는 빗츄(備中) 다까마쓰성(高松城)공략전 이었습니다.
한슈에이어 이나바를 수중에 넣은 히데요시는 모리의 맹장
시미즈 무네하루(淸水宗治)가 지키고 있던 다까마쓰성을 공격합니다.
무네하루의 용맹을 잘 알고 있었던 히데요시는 특유의 책략으로
무네하루에게 항복한다면 비젠과 빗츄를 주겠다고 회유합니다.
그러나 충심의 무사인 무네하루는 이러한 히데요시의 제안을 일축하죠.
더군다나 당시 다까마쓰성에는 모리 종가에서 파견된 지원군
수백이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도 매우 높았습니다.
이곳에서도 히데요시는 정면승부는 어렵다고 판단 계책을 쓰는데
그것은 바로 수공이었습니다.
당시는 일본의 바이우(梅雨 : 계절풍의 영향으로 내리는 큰 비)철이었고,
책사 구로다 간베에는 히데요시에게 수공할것을 권유합니다.
히데요시는 즉각 병사들을 동원 대규모 제방을 쌓게하고 물이 차기를
기다립니다.
그럼 다까마쓰성이 그렇게 위험해지기까지 모리의 주력군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당시 모리군은 오랜 숙적인 오토모와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고,
무능한 주군(데루모토)을 둔 죄로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모리측에서는 내심 오다와의 화의를 꾀하고 있었다 합니다.
하지만 용감히 저항하고 있는 무네하루를 모리측에서도 버릴 순
없었고, 모리의 양천(吉川元春, 小早川隆景)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다까마쓰성을 구원하려 출격합니다.
그러나 다까마쓰성은 이미 히데요시측의 수공으로 물바다가 된
상황이었고, 성중의 군사들은 대부분 아사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리군과 히데요시군이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모리의 4만대군에 대항하기 위해 노부나가가 주꼬꾸출진을 준비하던 중
혼노지의 변이 터집니다.
이 소식은 모리보다 앞서 히데요시에게 전해졌고, 히데요시는
모리와의 강화를 서두르죠.
모리가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기전에 서둘러 강화를 맺어야 했던
히데요시는 다까마쓰성에서도 무네하루의 할복만을 요구하는
관대한 조건을 내겁니다.
결국 양측은 별다른 충돌없이 화의하게 되고, 술까지 한잔하고
헤어집니다.
그런데 재밋는 건 그 다음날 벌어지죠.
히데요시와 화의한 다음날 마침내 모리군도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모리군의 무장들은 당장 히데요시를 추격하여 요절을
내자고 건의합니다.
하지만 모리의 양천은 적의 상중에 공격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라고 하며
히데요시를 추격하지 않습니다.
히데요시는 훗날 모리에게 이때의 일을 상당히 감사해하죠.
모리와 히데요시가 훗날 친하게 지내게 된것도 사실 이때의
모리측의 호의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모리군이 추격전을 전개했다면 히데요시는 도저히 천하의
패권을 잡지 못했겠죠. 사실 가쓰이에가 신속히 상경치 못한것도
노부나가의 죽음을 안 우에스끼군과 잇꼬종도들의 반격때문
이었으니까요
어찌되었든 히데요시의 주꼬꾸 공략은 이 시점에서 끝나게 됩니다.
다음번엔 이 연재의 종착역인 혼노지의 변에 관해 쓰기로 하겠습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혼노지의 변 #37
사실 이곳 전클회원 여러분이라면 혼노지의 변에 대해서는 아마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사건의 전개과정이나 내용보다는 왜 그러한 일이
일어 났는가에 초점을 맞출까 합니다.
아께찌 미쓰히데는 노부나가가 가장 총애하던 신하였고,
당시 단바,단고 이국의 50만석이 넘는 영지를 가지고 있던
오다가문의 최고인물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그가 왜 노부나가를 배신 했을까요?
뮬론 단순히 권력이 탐나서 그랬다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미쓰히데의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면 과연 그가 야심만으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럿으리라고는 상상키 어렵습니다.
미쓰히데의 반역요인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것은 바로
그가 노부나가가 자신을 버릴 것을 예상하고 미리 선수를
쳤다는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다까마쓰성을 포위하는 동안 모리군은 4만여의 대군을
이끌고 다까마쓰성을 구원하기 위해 옵니다.
노부나가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쓰히데를 비롯한 기나이의
영주들을 총동원 모리토벌에 나섭니다.
이 때 노부나가의 출진명령을 미쓰히데에게 알리러 온 사자는
그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소식을 전해줍니다.
좋은 소식은 장차 모리를 정벌한 후 모리의 영지였던 이즈모(出雲)와
이와미(石見)를 하사한다는 것이었고, 나쁜소식은 현재 가지고 있는
단바와 단고를 몰수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현실주의자였고 또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미쓰히데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이러한 명령을 사실상 자기를 버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죠.
하지만 미쓰히데가 보다 진취적이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기왕 잃게된것은 깨끗이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얻어 노부나가의
신임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당시 오다군의 전력으로 본다면 모리를 격파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그도 열심히 싸우기만 한다면 단바와 단고대신 이즈모와
이와미라는 새로운 영지를 얻을 수도 있었을겁니다.
하지만 미쓰히데는 오직 현실만을 생각했고, 또 그간 노부나가가 여러
빌미로 중신들을 파멸시키는 걸 보아왔기 때문에 도저히
긍정적인 쪽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히데요시에게 이러한 명령이 내려졌다면 어땠을까요?
그는 아마 모반보다는 어떻게하면 쉽게 적을 무찌르고 새로운
영지를 차지할 수 있을까에 더욱 골몰했을 것입니다.
영지문제에 이은 또하나의 반란원인은 그의 前歷에 있었습니다.
그는 본시 마지막 장군 요시아끼의 신하였고, 그간 노부나가가 그를
중용했던 것도 사실은 그가 오다와 막부사이의 가교역할을
잘 해줬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직 노부나가의 힘이 약했을때의 얘기지
이미 그가 천하를 장악한 뒤에는 미쓰히데가 전에 막신이었다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있어 마이너스요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노부나가는 변절자를 싫어했고, 미쓰히데는 처음부터
노부나가를 섬긴게 아니라 요시아끼을 버리고 노부나가에게 붙은
것이었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그러한 점을 문제삼아 그를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일설엔 노부나가가 미쓰히데를 멀리하기 시작하자, 모리측에
피신해 있던 요시아끼가 그에게 교토의 공경들과 연합하여
노부나가를 죽이라는 밀서를 보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설도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것이, 당시 교토의 공경들은 벼락출세하여
으시대는 노부나가를 싫어하였고, 또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죽인후 맨먼저 교토의 공경들과 접촉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미쓰히데가 모반후에
조정의 승인에 상당히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조정의 승인은 별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보다는 기나이의 자기쪽 세력을 결집시키는게
더 중요했겠죠.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린듯이 미쓰히데는 상당히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정의 승인을 받아 노부나가를
역적으로 만들고, 자신은 그 역적을 죽인 충신이 되고 싶었던 겁니다.
이거 또 얘기가 어수선해 졌군요.
마지막으로 미쓰히데의 모반원인에 관한 색다른 의견을 소개하겠습니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부하중 드물게 공부를 많이 한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공부라면 유학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다시말해 그는 근본적으로 유교적인 도덕정치를 추구하는 인물이었고
그러한 그의 이상에 노부나가는 점점 부합되지 않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미쓰히데의 눈앞에 있는 노부나가는 더이상 존경과
경의의 대상이 아닌 폭군에 불과했다는 거죠.
하지만 제가 볼때 이 의견은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전 미쓰히데란 인물을 대의를 위해 목숨도 바치는 충의지사라고는
생각지 않거든요. 사실 그도 전국시대의 전형적인 간사한 야심가중
하나였으니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론적으로 전 노부나가의 부덕과 미쓰히데의 과도한 의심이
모반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쓰히데는 사실 야전사령관 스타일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투보다는 외교과 내정에 능한 인물이었죠.
또한 그가 발탁되게된 원인도 사실은 그의 그러한 능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간지가 무너진 뒤 기나이는 안정을 되찾았고, 노부나가는 옛
막부의 구신들과 공경들을 포섭 더이상 미쓰히데만을 중용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외교는 사실상 필요도 없었고,
유능한 내정관도 많이 생겼으니까요
전 미쓰히데도 이점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쓰히데는 이미 자신이 노부나가에게 중요치 않은 존재임을
파악하였고, 사쿠마나 하야시처럼 불시에 당하기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겠죠. 전 미쓰히데가 영지이전이란 명령하나에
온갖 생각을 떠올리며 모반을 계획한것이 바로 지난날 노부나가가
보여준 잔혹한 숙청의 결과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노부나가가 부하들을 덕으로 다스리고 기나이평정후에 그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면 미쓰히데가 과연 노부나가를 그렇게 불신했을까요?
기나이평정후 노부나가는 상을 내리기는 커녕 오히려 벌을 내립니다.
노부나가는 여러지방의 호족들을 꼬드겨 상경시킨 후 가차없이
죽여버렸고, 자신의 적들은 아예 항복조차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라끼 무라시게의 예를 보십시요.
그는 노부나가의 상경하라는 한마디에 모반을 결심합니다.
이건 그만큼 노부나가가 부하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었죠.
이리하여 주꼬꾸출진을 명령받고 고민하던 미쓰히데는 드디어 모반을
결심하고, 조카 히데미쓰(秀滿)등을 이끌고 노부나가가 묵고있던
혼노지를 공격합니다.
당시 노부나가는 주꼬꾸출진을 앞두고 혼노지에 잠시 머물고 있었죠.
미틈없는 성격의 미쓰히데는 혼노지를 겹겹이 포위했고, 노부나가는
친히 활을쏘며 끝까지 분전했으나 결국 불타는 혼노지안으로 들어가
죽고 맙니다. 사실 이 장면에서 미쓰히데가 노부나가의 수급을 얻지
못한것은 상당한 실수였죠. 수급은 노부나가의 죽음을 가장 확실히
알릴 수 있는 도구였으니까요.
혼노지에서 노부나가를 죽이는 동안 또한편의 미쓰히데군은 오다가문의
후계자 노부타다(信忠)가 멀물고 있던 아즈찌성을 급습 노부타다마저
죽여 버립니다. 이때문에 오다가문은 미쓰히데토벌후 후계자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죠.
자신의 영지 한가운데였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었던 노부나가는 결국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부하에게 당하고 맙니다.
사실 역사상의 강자들을 보면 의외로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자신이 가장 믿던 부하에게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케사르는 원로원에서 양자인 부루투스의 칼에 맞아 죽고, 박정희도
자신의 안가에서 중정부장 김재규의 손에 죽었거든요.
이밖에도 이인자에 의해 당한 인물들은 그 수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실력자들은 이인자를 잘 만들지 않고, 그만그만한
애들 여럿을 키워서 서로 경쟁하게 하죠.
노부나가도 비교적 부하들을 잘 다뤘지만 마지막순간 방심으로
당하고 말죠.
이로써 노부나가의 전국제패의 꿈은 거이다 이뤄진 상황에서 끝나게 되고,
그 꿈은 히데요시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됩니다.

제목 : [幸村/기타]Ξ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38
사실 노부나가연재는 노부나가가 죽는 전편에서 끝났습니다.
하지만 사실 전 노부나가 연재에 이어 히데요시와 이에야쓰 연재를
하려고 했었고, 여건상 그게 어렵게 되어 그 뒤의 일들을
간략하게 인물별로 적어 볼까 합니다.

이께찌 미쓰히데(明智光秀)
노부나가, 노부타다부자를 죽이고 한때 천하를 장악한 듯 싶었지만
우군으로 알았던 호소까와부자, 이케다부자, 쓰쓰이준께이들이
히데요시측으로 돌아서면서 결국 야마자끼전투에서 대패
도주도중 농민들의 손에 죽습니다.
배신자의 비참한 최후였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빗츄 다까마쓰성을 공격하던중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게된 히데요시는 모리와 화친하고 전광석화와
같이 6일만에 상경 야마자끼에서 미쓰히데를 격파합니다.
그후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까와 시바다,다끼가와등을 제압하고,
그 뒤에 이에야쓰마저 제압하여 명실상부한 일본의 제 일인자가 됩니다.
후에 관백을 거쳐 태합에 자리에까지 올라 전설적인 입신출세를 합니다.
전 히데요시를 역사상의 승자로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히데요시에 의해 오다일족은 사실상 완전히 무너져 버리죠.
노부나가는 결국 남좋은 일만 하다 죽은것 같습니다.

도꾸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혼노지의 변 당시 재수없게도 교토에 머물고 있었던 이에야쓰는
천신만고끝에 미쓰히데의 손을 피해 하마마쓰로 귀국합니다.
그 후 병사를 일으켜 미쓰히데를 치려하지만 히데요시에게 선수를
빼았기죠.
그 뒤 노부나가의 2남 노부까쓰(信雄)와 함께 히데요시에 대적하지만
노부까쓰가 히데요시와 단독강화하는 바람에 싸울 명분을 잃고
물러섭니다. 그뒤 대세를 정확히 판단하고 히데요시에게 무릎을
꿇죠.
하지만 훗날 히데요시가 죽은 후 병사를 일으켜 세끼가하라에서
히데요리측 무장들을 격파하고 천하를 차지하죠.
이에야쓰역시 역사상의 승자였습니다.

시바다 가쓰이에(柴田勝家)
노부나가 사망후 미쓰히데를 치려하나 우에스끼등의 반격으로
히데요시에게 선수를 빼았깁니다.
다끼가와 가즈마스와 함께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까(信孝)를
오다가의 후계자로 추대하려 하지만 히데요시의 반대로
실패합니다.
후에 노부타까,다끼가와와 함께 히데요시를 공격하지만
시즈가다께전투에서 크게 패해 결국 키타노쇼의 천수각에서 할복하고 말죠.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에찌젠,와카사등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그는 야마자끼전투후
기요스회의에서 히데요시를 지지하여 대세를 히데요시쪽으로
몰아줍니다.
시바다와 함께 오다가문의 가로로 쌍벽을 이루던 그가 히데요시에게
가세하면서 많은 이들이 히데요시를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히데요시는 그의 뜻과는 달리 오다가문을 박살내고
결국 나가히데는 히데요시를 도왔던걸 크게 후회하며 병사합니다.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히데요시와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시즈가다께 전투에서 일찌감치
후퇴하여 히데요시를 맞이합니다.
후에 삿사 나리마사등의 반란을 제앞하고 우에스끼를 막아내면서
가가,노토,엣쥬의 백만석을 영유합니다.
후에 다이나곤의 지위에까지 오르며 히데요시 사후엔 오대로의
하나로서 오사까성에서 정무를 봅니다.
히데요시가 죽은 이듬해 병사합니다.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
시바다휘하의 맹장으로 죽을때까지 히데요시와 대립합니다.
시즈가다께전투후 마에다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항복하나 그후
다시 노부까쓰등과 연대하여 모반합니다.
그러나 이 모반은 마에다에 의해 진앞되고 또다시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게 됩니다.
후에 히데요시의 배려로 히고일국을 하사받지만 농민반란을
제앞하지 못하여 결국 하데요시에 의해 처형되고 맙니다.
오다가문에 충의를 지킨 인물로 대세관은 좀 없는 인물이었죠.

오다 노부까쓰(織田信雄)
시즈가다께 전투 후 히데요시에게 위협을 느껴 이에야쓰와 연대
하여 히데요시를 제앞하려 하지만 히데요시의 술책에 넘어가
단독강화를 맺고, 결국 히데요시에의해 영지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목숨은 계속 보존하여 세끼가하라전투당시 오사까측에서
동군쪽에 정보를 제공하여 토요토미멸망에 일조합니다.
역시 오래살고 봐야죠.

오다 노부타까(織田信孝)
시바다와 다끼가와에의해 후계자로 추대되어 히데요시와 맞서지만
비참하게 패배하여 죽습니다.
분수를 모르는 인물이었죠.

다끼가와 가즈마스(瀧川一益)
시나노와 고즈께를 영유하며 관동관령의 직책을 수행하나
호죠씨와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기요스 회의에서 별다른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이세로 돌아와 노부타까와 함께 반 히데요시의 군세를 일으키나
결국 패배하고 이후 시름시름 앓다 죽습니다.

가와지리 히데타카(河尻秀隆)
노부나가의 총신중 하나였고, 다께다토벌후 가히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사후 봉기한 잇꼬 잇끼에의해 최후를 맞습니다.

오다 히데노부 (織田秀信)
기요스회의에서 히데요시가 안고있던 산보시가 바로 히데노부입니다.
후에 히데노부라 칭하고 오다가를 계승하지만 이미 오다가는
천하의 주인이 아닌 토요토미가의 수하에 불과했죠.
히데노부는 히데요시의 배려로 약간의 영지를 차지하지만
세끼가라하전투당시 서군편을 들어 결국 그 영지마저 몰수당하고 맙니다.
그야말로 형편없는 인물이었죠.
호소까와(細川), 이께다(池田), 쓰쓰이(筒井), 가네모리(金森)등등
야마자끼전투 전후로 대세를 정확히 판단 히데요시에게 붙어
후에 히데요시의 부하로써 상당한 영지들을 얻습니다.

毛利 三家(毛利, 吉川, 小早川)
야마자끼전투직전 히데요시와 화친 그후 히데요시가 패권을 잡은
뒤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히데요시는 야마자끼전투 직전 자신을 추격하지 않은 모리에 감사하고
주꼬꾸 12개국 200만석의 영지를 모리 삼가가 영유토록 합니다.
이후 모리는 오대로의 하나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죠.
이상으로 혼노지의 변후 활약했던 인물들을 열거해 보았습니다.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 또 누가 충신이고 누가 역신인지는
여러분께서 직접 판단하셨으면 합니다.
이상으로 노부나가연재를 마치겠습니다.
그간 성원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38편을 마지막으로 정동희님은 1997년 6월 17일에 입대를 했습니다.
이 글들은 일본 전국시대를 이해하는 데 큰 보탬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쓴 이: 하이텔 TLOTR(정동희)
편 집: 하이텔 plunger1(전성모)
옮 김: 게임과기획 회원. 하얀용WhtDr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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